김희윤기자
“배우를 볼 땐 항상 눈을 먼저 본다. 눈빛에서 오는 분위기가 그 사람, 그리고 캐릭터를 완성하니까.”
한국영상자료원은 지난달 26일 정진우 감독의 ‘배신’(1964) 등 1960~1970년대 극영화 16편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현재 복원작업이 진행 중인 ‘배신’은 정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당대 톱스타였던 엄앵란과 신성일이 실제 연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를 기용하는 기준에 대해 “눈을 먼저 본다”는 그의 말처럼 ‘배신’에서 신성일의 안광은 형형하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는 엄앵란의 눈빛엔 슬픔이 어려있다.
60년 만에 데뷔 초기 작품을 마주한 그는 아직도 당시 촬영장 분위기가 기억에 생생하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충무로의 불도저’로 감독은 물론 연기와 제작까지 섭렵했던 그를 만나 ‘배신’과 그의 영화 인생 60년을 톺아봤다. 다음은 정 감독과의 일문일답.
-영화 ‘배신’은 엄앵란, 신성일 배우가 처음 이성으로서 감정을 느끼게 된 작품이었는데 현장에서도 그런 기류가 느껴졌는지.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진실한 감정보다 좋은 표정을 만들기는 어렵다. 당시 신성일씨가 막 신필름을 나와 여러 작품에서 주연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는데 ‘배신’ 촬영장에 지각을 자주 하곤 했다. 바닷가 신을 촬영해야 하는데 마침 늦게 도착한 신성일씨를 보니 화가 나서 다짜고짜 물에 뛰어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수영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나서 스태프들과 나는 먼저 현장을 정리하고 출발해버렸고, 현장에 차 있는 사람이 엄앵란씨뿐이라 두 사람이 같이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영화계 선배인 그녀가 저녁을 사면서 데이트했다고 하더라. 며칠 뒤 촬영장에서 두 사람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야 그들의 감정이 진실할수록 작품의 완성도가 좋아지니 지지하는 마음으로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스물세 살 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데뷔작을 찍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중앙대 법대를 다니면서 고시 공부보다 학교 연극반 활동에 더 매진했었다. 충무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연극반 최무룡 선배가 영화 제작부 일을 해보겠냐 제안을 해서 유현목 감독님의 ‘유전의 애수’(1956) 현장에 투입됐다. 유 감독님의 다음 작품 ‘잃어버린 청춘(1957)’에서는 깡패로 출연해 김승호 배우와 호흡을 맞췄는데 편집실에서 화면에 담긴 내 모습을 보니 너무도 작고 왜소해 보여서 존재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학 땐 배우를 꿈꾸며 다양한 작품에서 곧잘 주연만 하던 나였는데, 화면으로 보니 영 아니더라(웃음). 그렇게 배우의 꿈을 접고 감독이 되기 위해 다양한 작품에서 스태프로 실력을 키워나갔다. 박상호 감독의 ‘장미는 슬프다(1958)’, 신경균 감독의 ‘화심(1958)’과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오면(1958)’의 촬영부를 거쳐 다시 박상호 감독의 ‘추억의 목걸이(1959)’에선 조감독을 맡게 됐다. 당시 영화 스태프는 거의 무보수로 경력을 쌓기 위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좋았다. 일단 어떤 현장을 가도 배울 것이 있었고, 제때 밥은 챙겨주니까. 그렇게 정창화 감독님 밑에 들어가 조감독 겸 제작부장으로 ‘지평선(1961)’과 ‘장희빈(1961)’ ‘대지의 지배자(1963)’를 작업하면서 제작자들로부터 데뷔작 권유가 이어졌다. 더 배우고 완숙해졌을 때 하겠다고 고사했었는데, 당시 잘 알고 지냈던 정진모 제작자가 간곡히 제안을 해와 ‘외아들’로 1963년 데뷔하게 됐다.
-이번에 발굴된 ‘배신’도 그렇지만 이후 ‘초우’ ‘초연’ 등을 보면 당시 영화들과는 다른 영상 문법을 시도한 점이 두드러진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모두가 소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소설 원작의 작품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어떤 이야기의 줄거리에 맞춰 천편일률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그땐 ‘망해도 좋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시 같은 영화를 찍기 위해 노력했다. 꼭 말로 모든 걸 다 표현하진 않듯이, 대사가 없어도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 카메라에 의해 스토리가 진행되는 영화를 선보였다. 그렇게 ‘시네포엠(Cine-poem)’ 영화를 만들어 대중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니 영 실패한 선택은 아니지 않았나 싶다.
-‘섬개구리 만세’로 한국 영화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었는데, 당시 현지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1972년 제2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는데, 그때 인도의 사트야지트 레이 감독이 ‘천둥소리’로 같이 경쟁 부문에 올랐었다. 경쟁 부문 진출작이 지금처럼 많지 않을 때라 감독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는데 현장에서 ‘섬개구리 만세’가 후시녹음 때문에 배우 입과 대사가 안 맞는 영화라는 지적이 나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라. 당시 인도만 해도 앞서간 영화 기술로 동시녹음을 했는데, 우리는 할리우드에서 첫 유성영화이자 동시녹음을 시도한 ‘재즈싱어’가 나온 지 50년 가까이가 됐는데도 후시녹음으로 제작하고 있었으니까.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길로 영국으로 건너가 동시녹음 기술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TODD-AO 카메라를 구입해 ‘율곡과 신사임당(1978)’을 촬영했다. 이 작품이 국내 첫 동시녹음 영화가 됐다.
-‘충무로의 불도저’라 불리며 불같은 열정과 거친 말투로 다양한 일화를 남겼다.
▲현장에서 내가 배우들에게 세게 이야기했던 것은 그 자신과 작품을 위해 배역과 혼연일체 되는 연기를 주문하다 보니 화난 어투로 표현된 것일 뿐, 내 나름대로 배우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그저 화만 내는 감독이었다면 그 배우들과 어떻게 이후 많은 작품을 함께하며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눌 수 있었겠나.
-직접 휘발유를 들고 문공부에 뛰쳐 들어간 사건도 있었다.
▲정치깡패의 암투와 이를 취재하는 여자 기자의 이야기를 다룬 ‘폭로(1968)’를 제작했을 때인데, 실제 인물인 정치깡패 이정재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보니 문공부에서 거듭 심의를 반려하더라. 이름을 가명으로 바꾸고 수정도 했지만 계속 반려되자 화를 참을 수 없어 문공부 사무실 2층에 휘발유를 들고 찾아가 통을 열고 “나 분신자살하러 왔다. 모두 무릎 꿇어!” 외치며 거칠게 항의했었다. 결국 20분 분량을 잘라내고 나서야 심의에 통과해 새해 극장가 흥행 1위를 기록했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다.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는데 감회가 어떤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기술적 환경이 워낙 발달하다 보니 요즘 감독들 작품은 영상미는 나아졌을지 몰라도 가슴을 울리는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의 관점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