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송승섭기자
실손의료보험 청구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의 법안이 14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앞으로 보험료를 더 간단하게 타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해당 법안을 두고 의사협회와 약사협회가 “참담하다”며 맹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반면 손해가 커질 수밖에 없는 보험사들은 법안 통과를 찬성하고 있고요. 간단해 보이는 실비청구간소화법에 숨은 의료계와 보험계의 속내는 뭘까요?
지난 6일 국회에서 통과된 보험업법 개정안은 실손의료보험을 청구하는 과정을 쉽게 만드는 게 골자입니다. 실손의료보험은 질병·상해로 의료기관에서 입원·통원 치료를 받거나 처방조제를 받은 경우에 실제 부담한 의료비를 보상받는 보험상품입니다. 흔히 ‘실손보험’ 혹은 ‘실비보험’이라고 부르곤 하죠.
그런데 실비는 요건에 해당해도 보상을 받는 조건이 복잡합니다. 먼저 진료를 마친 뒤 병원이나 약국에 직접 방문해 진료영수증, 세부내역서, 진단서 같은 서류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이 서류들을 팩스·온라인·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보험설계사나 보험사에 보내야 했죠. 의료기관을 다시 방문해 서류를 찾고 다시 전달까지 해야 해서 번거로운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러다 보니 보상을 받을 수 있음에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습니다. 특히 노년층의 경우 복잡한 절차 때문에 피해가 더 크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이렇게 미청구한 실손보험금은 2023년 3211억원에 달합니다. 2021년 2559억원, 지난해 2512억원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고요.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 소비자가 청구서류를 일일이 발급받아 제출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냥 병원이나 약국에 찾아가 요청하면 됩니다. 그럼 의료기관이 소비자를 대신해서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보험사에 보내죠. 종이 문서를 보내는 건 아니고요. 전자 방식으로 전송하게끔 했습니다. 법안 공포 후 1년 뒤부터 시행되는데 의원급 의료기관과 약국은 2년까지 유예합니다.
물론 종이 서류를 전자 방식으로 받으려면 새로 시스템을 만들어야겠죠. 개정안에 따라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할 의무는 보험회사가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비용도 보험회사가 내야 하고요. 다만 시스템의 경우 대행 기관에 위탁할 수도 있긴 합니다. 또 의료·보험업계가 참여하는 공동위원회를 마련하고 실손보험 창구 전산화의 원활한 운영방안을 협의하도록 했죠.
그런데 소비자들의 편리함을 위한 법안이라면, 진즉 통과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이러한 문제를 몰랐던 걸까요? 사실 간단해 보이는 보험업법 개정안은 통과까지 14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소비자 불편을 이유로 개선을 권고한 게 무려 2009년입니다. 이후 국회의원들이 앞다퉈 법안을 발의하긴 했지만, 매번 입법이 무산됐죠.
바로 의료계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대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약사회는 법안이 통과된 날 성명을 내고 “국회와 정부가 합심해 민생법안 처리라는 각본대로 법안 의결을 강행해 그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오직 보험사의 이익만을 위해 법안 심의를 강행한 국회와 정부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다시 한번 끝없는 분노를 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의료계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현재 의료법·약사법과 충동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개정안은 의료기관이 보험사에 환자의 정보를 넘기도록 합니다. 그런데 의료법과 약사법은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진료기록이나 조제기록부를 열람하도록 하거나 사본을 제공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죠. 의료계가 법률 검토를 거쳐 개정안의 위헌소송을 준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의료계가 반대하는 진짜 이유에 ‘업무부담 과중’이 있다고 말합니다. 보험금을 주고받는 일은 소비자와 보험회사가 해야 할 일인데, 왜 청구대행을 의료기관이 해야 하냐는 거죠. 법안 심사에서도 정무위 전문위원이 “본연의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간보험계약 관련 사항인데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협회는 ‘정보전송 대행 기관’을 정하라고 요구한 상태입니다.
보험업계는 어떨까요? 수천억원에 달하는 돈을 소비자들이 꼬박꼬박 청구하게 되니 역시 반대하고 있을까요? 사실 보험업계는 해당 법안의 통과를 찬성하고 있습니다. 우선 간소화에 따라 필요 없는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보험사는 매년 막대한 양의 실비 청구 문서를 받고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영수증을 촬영한 사진이나 스캔본을 확인하고 입력하는 계약직 직원까지 두고 있습니다. 전산망을 구축해야 하고 당장의 손해가 커질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는 겁니다.
겉으로 얘기하지 않지만 속내에는 ‘데이터 확보’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보험사들은 전자화한 의료정보와 진료데이터를 축적하게 됩니다. 보험사가 데이터를 많이 확보했다는 건 그만큼 정교한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질병 위험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들의 가입을 거절하고, 보험료를 올리거나,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근거가 늘어날 수 있죠. 물론 법에는 업무 외 용도로 자료를 활용하지 못하게끔 돼 있지만, 법안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가명 처리한 데이터의 경우 애매한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