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선기자
26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물시장. 넓은 아스팔트 도로 양옆으로 과일 상인들이 줄줄이 과일을 팔고 있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목청을 높였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곧 과일 상인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가격을 인하하는 '떨이'를 시작할지 눈치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신호탄은 한 사과 장수가 쐈다. 5개 5000원이던 사과를 같은 가격에 8개를 팔기 시작한 시점부터 판도가 바뀌었다. 옆 가게들도 곧장 떨이를 시작했다. 바로 옆 복숭아 가게는 10개에 5000원이던 '딱딱이 복숭아'를 3000원으로 내렸다. "이제 3000원입니다!" 복숭아 상인이 가격을 낮췄다고 소리쳐도 행인들은 본체만체 지나갔다.
기상청이 장마 종료를 선언했지만, 과일 상인들의 어려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물가는 오르고 손님은 줄어든데다 과일들이 오랫동안 비에 노출된 탓에 팔기도 어려워졌다. 과일은 특성상 비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이로 인해 과일이 썩기 전에 이익을 남기지도 않고 '땡처리'해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10년 동안 장사를 한 이모씨(72·여)는 "과일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썩는다고 하더라"며 "하도 빨리 썩으니 급하게 물건들을 처리하는데 5개에 1만원에는 팔아야 이익이 남는 복숭아를 지금은 8개로 묶어서 팔고 있다"고 말했다.
장마가 끝났다고 긴장을 놓을 수도 없다. 갈수록 위력이 커지는 태풍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이씨는 "태풍이 과일을 재배하는 지방에 피해를 주면 물건을 구하기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며 "이제 여름 휴가철이라 오는 손님들도 없을 텐데 추석이 오기 전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 것 같아 걱정이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마 이후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이 너무 높다는 게 시장 상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7%로 21개월 만에 2%대 물가상승률을 기록했지만 상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0년 이상 참외 장사를 한 박모씨(74·여)는 "요즘 1만원 하던 참외 한 박스가 일주일 사이에 2만5000원으로 오르고 있다"며 "아직 호우로 인한 물가가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손님들도 물가 상승에 부담을 느끼니 시장을 찾질 않는다"고 말했다.
과일 상인들만 폭우에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니다. 청과물시장 인근 식당들도 줄어드는 손님에 울상을 지었다. 한 한식뷔페집은 코로나19 유행이 끝났는데도 장사가 안된다고 하소연했다. 물가까지 올라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있던 손님마저 떠날까 봐 코로나19 때 올렸던 가격을 또 올리기도 쉽지 않다. 뷔페집 사장 정모씨(70·남)는 "아직도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있는 줄 알았다. 도저히 손님 회복이 안 된다"며 "과거 식사 시간만 되면 꽉 찼던 식당인데 이제는 군데군데 비어 있다"고 말했다.
시장 구석에서 복숭아를 팔던 한 할머니는 앞다퉈 가격을 내리는 상인들 사이에서 패배를 인정했다. 박스 한쪽을 쭉 찢어서 복숭아 한 박스를 1만원에서 8000원으로 깎는다고 펜으로 쓱쓱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팔면 이윤이 남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윤은 무슨, 이거 다 싸서 집에 들고 갈 거야?"고 답했다. 가격 인하를 알리는 박스 조각을 좌판 앞에 걸었지만 손님은 오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