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지난 12일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SBS ‘김태현의 정치쇼’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대구·경북(TK)의 정치 현실을 보여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TK는 호남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이른바 TK 정서에 부합하는 인물이 보수정당의 대선후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호남 정서에 부합하는 인물은 더불어민주당 쪽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호남과 TK 출신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각광을 받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향이 TK이거나 호남인 정치인들은 있지만, 그들의 정치적 뿌리를 살펴보면 서울 등 중앙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TK나 호남에서 태어났어도 삶의 대부분은 서울을 연고로 해서 살아온 인물이라는 의미다.
2000년 이후 대선의 사례를 봐도 TK에서 키운, 호남에서 키운 지역 정치인들은 대선후보와 거리가 멀었다.
국민의힘 쪽의 경우 2002년 이회창 후보, 2007년 이명박 후보, 2012년 박근혜 후보, 2017년 홍준표 후보, 2022년 윤석열 후보가 나섰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는 TK 출신이지만, 중앙 정치인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명박 후보는 서울시장을 지낸 인물이고, 박근혜 후보 역시 지역에서 키운 정치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구광역시장인 정치인 홍준표는 TK 출신이지만, 서울 동대문 지역구에서 다선 의원이 된 인물이다. 현재는 TK에 정착해 있지만, 서울에서 정치적 중량감을 키웠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2020년 제21대 총선의 TK 국회의원 당선 결과를 살펴보면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 대구는 곽상도, 류성걸, 강대식, 김상훈, 양금희, 김승수, 주호영, 홍준표, 홍석준, 윤재옥, 김용판, 추경호 등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홍준표 의원은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나 대구시장이 됐다. 주호영, 윤재옥 의원은 전·현직 여당 지도부 출신이고 추경호 의원은 경제 부총리다. 현역 의원 중에서는 주호영 의원 정도가 TK를 기반으로 성장한 대선주자급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여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북의 경우 김정재, 김병욱, 김석기, 송언석, 김형동, 구자근, 김형식, 박형수, 이만희, 임이자, 윤두현, 김희국, 정희용 등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이들 가운데 2027년 대선을 돌파할 인물은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과거 보수정당에서 TK 출신 정치인 강재섭, 김윤환 등이 중앙 정치 무대를 쥐락펴락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중량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호남의 상황은 어떨까. 더불어민주당 역시 2000년 이후 대선 상황을 살펴본다면 호남 지역 출신 정치인들은 대선 후보와 거리가 멀었다. 2002년 노무현 후보, 2007년 정동영 후보, 2012 문재인 후보, 2017년 문재인 후보, 2022년 이재명 후보 등이 대선에 나섰다.
노무현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부산·경남 출신 정치인이다. 이재명 후보는 고향은 TK인데 경기도지사를 지내는 등 정치 이력은 수도권에서 쌓은 인물이다. 정동영 후보는 전북 전주가 키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호남 출신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2027년 대선에서 호남 국회의원들은 다크호스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총선에서 당선된 이들을 살펴보면 우선 광주는 윤영덕, 이병훈, 송갑석, 양향자, 조오섭, 이형석, 이용빈, 민형배 등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대선주자급 정치인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전북은 김윤덕, 이상직, 김성주, 신영대, 김수흥, 한병도, 윤준병, 이용호, 이원택, 안호영 의원 등이다. 전남은 김원이, 주철현, 김회재, 소병철, 서동용, 신정훈, 이개호, 김승남, 윤재갑, 서삼석 의원 등이다.
지난 총선에서 전남과 전북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 역시 대선주자급 중량감 있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전남 목포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앙 정치를 주름잡았던 시절과는 많이 다른 양상이다.
호남과 TK에서 키운 정치인들이 대선주자급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총선 때마다 물갈이 문제로 홍역을 앓기 때문이다. 3선, 4선 중진 의원은 물갈이의 핵심 타깃이 되고, 그 자리는 정치 신예로 채우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또 TK와 호남에서 성장한 지역 정치인들이 ‘큰 꿈’을 꾸는 과정에서 서울로 정치 무대를 옮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TK와 호남뿐만 아니라 충청과 PK(부산·경남) 등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TK와 호남 지역 정치인들이 유독 대선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는 이른바 ‘잡은 물고기’ 이론과 무관하지 않다. 웬만하면 TK는 국민의힘, 호남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찍어 줄 테니 다른 지역에서 통할 후보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TK와 호남 정치인은 역차별을 받게 된다.
2000년 이후 대선에서 이어졌던 이런 관행은 2027년 대선에서도 반복될까.
민주당에서는 전남지사를 지낸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국민의힘에서는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홍준표 대구시장이 유력한 대선후보군에 포함돼 있다. 이들이 당내 공천 경쟁의 승자가 된다면 투표용지에서 사라졌던 TK, 호남 정치인의 명맥이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당내 대선 레이스를 돌파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사실 TK와 호남 지역 정치의 고민은 따로 있다. 정치인 홍준표는 1996년, 정치인 이낙연은 2000년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20년이 넘도록 정치인으로서 담금질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위치가 됐다. 대선주자급 정치인은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다. 이름도 알리고, 능력도 인정받고, 정치적 효능감도 검증받은 이후에야 대선주자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인 홍준표와 이낙연이 언젠가 현역에서 은퇴하는 날이 온다면 후배 정치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데 TK와 호남 지역 정치인 가운데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인물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의 TK-호남 국회의원을 지역에서 큰 인물로 키워주고 밀어주는 흐름도 아니다. 2027년 이후에는 TK와 호남 정치인 이름을 대선 투표용지에서 보는 게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