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주기자
"아이오닉5나 EV6 같은 전용전기차는 국내 기업 부품이 99% 이상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일부 차량용 반도체나 주행보조모듈 정도만 해외 기업에서 공급받는다. 과거 내연기관차를 만들 때는 완성차 국산화율을 따져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분석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현대차 관계자)
이동수단을 둘러싼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면서 자동차를 만드는 공식이 바뀌고 있다. 과거 핵심기술은 선진국에 기반을 둔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나 소수의 대형 부품업체가 주도했다. 반면 전동화·자율주행으로 상징되는 미래차 시대에는 첨단 IT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등이 최종 완제품의 경쟁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면서 완성차 제작과정이 분산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전기차 메이커를 중심으로 전자장치(전장)·이차전지 등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갖는 분야에 관심이 높아졌다. 차량용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국내 주요 기업의 차량용 부품을 하나씩 살펴봤다.
우선 미래 모빌리티 분야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있는 차량 인포테인먼트 시스템(IVI)용 반도체는 삼성전자가 비중을 늘리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IVI용 프로세서 '엑시노스 오토 V920'을 2025년부터 현대차의 고가 모델인 제네시스에 넣기로 했다. IVI는 주행 관련 다양한 정보와 오락 등 즐길 거리 기능을 동시에 제공하는 시스템으로, 삼성전자는 독일 폭스바겐과 아우디 등에 납품했다.
디스플레이 부분에선 삼성디스플레이가 제네시스의 OLED 디스플레이 공급사로 선정됐다. LG디스플레이는 현대차 계기판용 LCD(액정표시장치) 대부분을 공급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2021년 벤츠에 디지털콕핏용 OLED를 공급한 이후 고객사를 확대하고 있다.
배터리에선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가 세계 시장 경쟁력을 키웠다. 배터리는 전기차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부품으로 꼽힌다. 특히 최근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가 전동화 전환에 속도를 내면서 배터리 수급이 쉽지 않아진 터라 글로벌 시장 곳곳에서 완성차와 배터리업체간 합종연횡이 활발해졌다. LG나 SK, 삼성은 현대차를 비롯해 제너럴모터스(GM), 포드, 스텔란티스 등 다양한 업체와 합작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친환경차 핵심 부품인 구동모터코아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사업을 키우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전기차용 부품인 구동모터코아 생산량을 확대하기 위해 연내 폴란드에 신공장을 착공하고 증산에 나선다. 이 공장은 올해 하반기 공사를 시작해 2025년 가동될 예정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전기강판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전기강판은 기존 자동차 강판과 비슷하지만 더 가볍고 강하게 제작해 주행거리를 늘린 게 특징이다. 포스코는 친환경차 제품 및 솔루션 통합 브랜드 'e Autopos'를 론칭하고 기가스틸을 연간 100만t 생산체제를 완성했다. 포스코 기가스틸은 외부 충격에 대비해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구성돼 차량의 바디와 차체 중량을 지지하는 현가장치 등에 쓰인다. 현대제철은 1.8GPa(기가파스칼) 프리미엄 핫스탬핑강을 개발해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하기도 했다. 무게는 줄이면서도 강도를 높인 철강재다.
효성첨단소재는 전기차용 타이어코드를 생산하고 있다. 타이어코드는 타이어 내부를 구성하는 보강재로, 타이어의 형태를 유지하고 내구성 강화에 필요한 핵심 소재다. 타이어 코드는 효성첨단소재가 51%가량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차량용 MLCC에선 삼성전기가 고객사 확보에 총력을 다하는 중이다. 일본 무라타와 TDK가 차량용 MLCC 시장의 선두 업체지만, 향후 미래차 시장이 커지면 확보할 수 있는 고객사가 많다는 점에 주목해 성장 여력을 살피고 풀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차량용 통신 모듈, 전기차용 파워, 차량용 센서 등에선 LG이노텍이 성장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LG이노텍의 전장부품 사업부는 차량 반도체 수급 차질에도 올해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22% 증가한 3817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충전솔루션(LG전자) ▲전장부품(LG전자) ▲파워트레인(LG마그나) ▲인포테인먼트시스템(하만) ▲헤드램프(ZKW)도 국내 업체가 두드러진 분야다.
삼성·LG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전기차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LG 한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이 세계 최고 배터리"라며 "우리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모터의 성능, 내구성도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냉연강판을 압축해 냉장고로 만드는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냉연강판으로 자동차도 만든다. 냉장고를 찍어내듯이 자동차를 찍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삼성은 과거 자동차를 만든 경험도 있다. 두 회사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전자, 가전, 부품업체이기 때문에 첨단 전자, 부품 기술 덩어리인 전기차에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전기차를 직접 생산할 생각은 없다. 세계 최고 자동차 업체들과 경쟁하는 것보다는 세계 최고 전자 장비와 부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란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모두 합심한 덕분에 미래지향적 첨단제품인 전기차를 순수국산 부품으로 꽉 채울 수 있었다는 평가다. 과거 국산 첨단제품은 핵심부품이 외산이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 만든 휴대전화의 통신칩은 퀄컴, LG가 만든 노트북의 중앙처리장치는 인텔 제품이었다. 하지만 전기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국산부품을 쓴 진정한 의미의 국산 첨단 제품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을 중심으로 한 전기차 관련 산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이 전방위적으로 투자를 늘리는 한편, 신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어 전기차 사업을 한국이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한국 자동차 부품사들은 현대차·기아와 함께 북미, 인도 등에 동반 진출하면서 20년 이상 해외 공장을 운영한 경험을 축적했고, 현대차그룹향 전기차 부품 납품으로 레퍼런스도 갖추고 있다"며 "현대차그룹이 2026년 글로벌 판매 920만대로 1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 자동차 부품사들도 재조명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수 경제 활성화 부분도 기대된다. 통상 자동차산업은 배터리 등 방대한 전후방 연관산업과 150만개의 직간접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 국가전략산업이다. 국내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반면, 지난해 전기차 수출액은 82억달러로 한 해 전보다 45%가량 늘었다. 국내 전체 자동차 수출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5.6%에서 지난해 15.2%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서 글로벌 자동차 교역시장도 바뀌었다. 내수 중심으로 평가받던 중국은 올해 1분기 99만4000대를 수출, 일본(95만4000대)과 독일(83만9000대)을 제쳤다. 중국이 자동차 수출 1위로 올라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커다란 내수시장을 등에 업고 경쟁력을 키우면서 전통의 자동차 강국을 제친 것이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자동차 수출은 완성차보다 부품 산업에서 주도할 여지가 크다"며 "내연차·미래차 부품 업체 모두 대형화나 자동화 등으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지난 5월 자동차 부품기업의 미래차 전환을 약속하며 "전동화·지능화 등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 전환으로 우리 자동차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면서 "정부와 업계는 부품업계의 미래 대응 역량을 강화하고 수출 확대를 위한 지원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