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인생은 삶에 주어진 점을 찍으며 자신의 선을 그려가는 것”

김현정 나사(NASA·미국항공우주국) 연구원
낯설고 고된 연구소 생활에 많이 울어…부모의 격려에 다시 일어서
“문화가 다른 곳에서 인정받으려면 서로 간에 신뢰부터 쌓아야”

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해 오는 10월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3 여성리더스포럼’을 통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들은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장벽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차별에 위축되거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을 파워 K-우먼 후보로 뽑아 소개합니다.

세계인이 ‘우주 탐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관, 나사(NASA·미국항공우주국). 10개의 산하기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필드센터인 버지니아 랭글리 연구소(Langley Research Center)에서 14년째 매일 우주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한국인 여성 연구원이 있다. 그의 이름은 김현정.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재료공학을 공부한 순수 국내파인 그는 나사의 일원으로서 남다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김 연구원의 주 연구 분야는 행성 탐사에 사용될 소재다. 달 탐사에 사용될 ‘정전발전 장치’가 대표적이다. 그는 “정전 발전 장치는 기존의 달 탐사선과 다른 시스템의 전원이 될 수 있고 우주복을 입은 인간에게 끼치는 부작용도 완화시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김현정 나사 연구원이 만들고 있는 우주용 망원경. 사진 제공=김현정

그동안 그가 창의적인 발상과 지독한 노력 끝에 수상한 상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다. 그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나사 멘토 감사상’을 일곱 차례 수상했다. 2012년에는 ‘미국 항공우주공학협회 햄튼 지부 올해의 젊은 과학자상’을, 2020년에는 ‘나사 핸리 리드 우수 논문상’과 ‘나사 우수기술성취 메달’을 받았다. ‘나사 우수 연구팀상’은 물론 ‘나사 특허상’도 세 차례나 받았다.

이 중에서도 그가 스스로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상은 ‘나사 우수기술성취 메달(ETAM)’. 이것은 나사 미션에 중대한 기여를 한 기술을 개발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그동안 그가 ‘내가 하는 이 연구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 혼자 고민하며 실험실에서 묵묵히 해나간 연구들이 동료들에게 인정받았음을 입증하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은퇴한 상사 등과 함께 나사 잔디밭에서 기념 촬영을 한 김현정 연구원. 사진 제공=김현정

그 역시도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업무는 물론 심지어 영어까지 서툴러 꾸지람을 받은 적도 많았다. 낯설고 고된 연구소 생활의 무게감에 짓눌려 울기도 많이 했다. 그 시절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언제나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었다.

“나사에서 주어진 첫 과제 중 하나는 ‘한달 안에 예전 연구원이 만든 것과 같은 샘플을 10개 더 만드는 일’이었어요. 가령, 도너츠 하나를 만든 레시피가 있으니 똑같은 것을 10개 더 만들라는 것이었죠. 말로만 들으면 간단한 것 같은데 문제는 6개월 동안 아무리 레시피 그대로 따라 해도 똑같은 샘플을 한 개도 완성하지 못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무언가 조건이 달라졌거나, 레시피 자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레시피를 수정하면서 계속 시도를 했고 상사는 원래 레시피대로 만들어내라고 강요를 하면서 서로 갈등 속에 지쳐가고 있었어요.”

"불평할 시간에 어려움 극복할 방안 마련해라"

그는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 고민을 털어놓았고 아버지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럼 원래 레시피와 너의 레시피 둘 다 해서 비교 증명을 해봐. 네가 맞다는 것을 말이 아닌 실험과 데이터로 보여 주고 너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해. 그러면 그 다음 일은 쉬워질거야”라고. 그때 그는 “지금도 쉴새 없이 바쁜데 어떻게 두 개를 다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불평할 시간에 해서 보여줬으면 이미 하고도 남았겠다”라며 독려했다.

“결국 아버지의 조언대로 저는 두 개의 실험으로 제 방식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요. 그랬더니 상사가 이전 레시피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후론 제가 하는 모든 연구를 믿고 지원해주었지요. 이 일로 문화가 다른 곳에서 인정받고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신뢰를 쌓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사 연구소에서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일까. 김 연구원은 주저하지 않고 ‘신뢰’라고 대답한다. 그는 “나사에는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재차 강조하며 가까운 동료인 가프리 박사와의 사례를 소개했다.

“어느 날, 제가 거의 1년 동안 생각해 내용을 정리한 아이디어를 동료인 가프리 박사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는 짧은 시간에 수학 공식에 물리학 이론까지 가져와서 일목요연하게 제 아이디어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더라고요. 저는 엄청난 자극을 받았고 집요하게 더 깊이 파고들어 이론을 다지고 실험으로 검증해 결국 제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어요. 노력으로 지능을 이겼다고 할까요(웃음). 이 일로 가프리 박사는 저를 더욱 신뢰하게 됐고 지금은 소울메이트가 되었지요.”

김현정 연구원이 자신이 만들고 있는 우주용 망원경을 드론에 장착해서 실험하고 있다. 사진 제공=김현정

되짚어보면 그가 나사에 들어가게 된 것도 ‘신뢰감’ 덕분이었다. 김 연구원은 2008년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있을 때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린 세계학술학회에 참석했다가 나사에서 심우주 에너지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원들을 만났다. 당시 유럽 최대의 활화산인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에트나 화산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에 참석 예정자 일부는 이탈리아행을 취소했지만 그는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나사에서 일하는 것을 꿈꿔본 적도 없었어요. 마지막 날 주최 측에서 시칠리아 시내 투어를 마련해주었는데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시내 쇼핑을 선택했죠. 그때 초청 연사였던 나사 연구원이 저에게 ‘언덕 위에 있는 유적지에 산책을 가려는데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겠냐’고 제안하길래 흔쾌히 수락했어요. 그렇게 둘이서 해가 저물어 가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저의 연구와 나사의 연구에 대해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렇게 학회를 마치고 돌아와 카이스트의 실험실로 출근한 그에겐 “졸업과 동시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나사 연구원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당시 그가 박사과정에서 하는 연구는 반도체 관련 연구였고 나사 연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물론 그가 사용하던 장비(박막 제작을 위한 진공 장비)와 재료 공학 지식은 나사 연구원이 진행하고 계획하는 연구에 도움될 소지가 있기는 했다. 또 그가 카이스트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경험이 나사 연구원이 당시 진행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16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가 나사 연구원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다른 이들이 가길 꺼리는 등산을 흔쾌히 동행하는 모습에서 ‘이 사람은 뭘 시켜도, 그 일이 험난하고 남이 안 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라도 씩씩하게 해내겠구나’하고 신뢰를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신뢰 쌓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성실

그는 최근에 읽은 스티븐 M. R. 코비의 '신뢰의 속도: 모든 것을 바꾸는 단 한 가지(The SPEED of Trust: The One Thing That Changes Everything)'라는 책을 추천한다. 신뢰의 가치에 대해 잘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신뢰를 쌓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성실”임을 덧붙여 강조한다.

“다행히도 제가 가진 최대 강점이 성실함이에요. 저는 꽤 부지런하거든요. 예전 팀 프로젝트 동료가 ‘혹시라도 누가 너 보고, 좀 부지런해라 라고 하면 너를 완전히 잘못 본 것이니 같이 일할 필요 없다. 그리고 나에게 데려와라, 그러면 너만큼 부지런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말해 줄테니까!’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요.”

김 연구원은 2009년 4월부터 랭글리 연구소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2021년 9월에 정직원이 됐다. 미국 정부 연방 공무원의 정년은 1986년에 폐지되었으니 그는 첫 직장에서 이제 본인이 원할 때까지 일하게 됐다. 나사는 일반적인 근무환경이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직원들이 새로운 분야의 학사나 석사 공부를 원하면 학비를 지원해주는 등 혜택도 풍부하다.

"나의 업무는 꿈속에서 새로운 꿈 꾸는 것"

김 연구원은 “나사는 흔히 말하는 꿈의 직장이 맞다”며 “저의 업무는 꿈속에서 일하면서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고 나사에서 그를 성장으로 이끌어준 좋은 인연만 만난 것은 아니다. 아시아인 여성이라고 은근히 무시당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어떤 이들은 본인들 기분 풀자고 저를 자극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런 경우엔 그냥 무시한다”며 “그들이 던진 쓰레기 봉지를 선물처럼 끌어안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김 연구원은 정신적으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손편지를 꺼내 가슴에 새긴다.

2021년 한국 방문 당시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에서 어머니와 셀카를 찍은 김현정 연구원. 사진 제공=김현정

“현정아, 우리 인생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직선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무수히 많은 점이 만들어낸 선이란다. 각각의 점들은 내 삶의 발자취란다. 네 삶의 모든 순간을 거쳐야지 어느 한 부분은 뛰어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는 없어. 삶은 어느 한 점에 머무를 수 없으니 네 점을 잘 찍으면서 꾸준히 네 삶의 선을 그리렴.”

그에게 가족은 사람과 사랑을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다. 그는 “가족들과 대화하며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이 든든하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었다”며 “아버지에게 용기를 배웠고 어머니에게 지혜를 배웠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현재 솔로인 그가 바라는 다음 점(點)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가 도달하고 싶은 점은 어제보다 나은 자신의 모습으로 마지막 점을 찍는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그려온 선을 봤을 때 그것은 이미 확정된 미래인 것 같다.

*김현정 연구원은

1980년 경기도 포천 출생. 2003년 연세대학교 재료공학과 졸업 후 카이스트에서 재료공학과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9년 4월부터 미국 국립항공연구소(NIA)를 통해 나사 랭글리 리서치 센터 계약직원으로 활동하다 2021년 9월부터는 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사 멘토 감사상’ ‘미국 항공우주공학협회 햄튼 지부 올해의 젊은 과학자상’ ‘나사 우수 연구팀상’ ‘나사 특허상’ ‘나사 핸리 리드 우수논문상’ ‘나사 우수기술성취 메달’ 등을 수차례 수상했다. 이 중에서도 그가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상은 2020년에 받은 ‘나사 우수기술성취 메달’로 이는 나사 미션에 중대한 기여를 한 기술을 개발한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메달이다. 저서로는 '점(DOT)_나사에서 10년간 배운 100가지 지혜'가 있다.

편집국 추명희 기자 stella@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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