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기자
애플이 3년 만에 새로운 반도체를 공개했다. 2015년 후 첫 신제품인 비전 프로(Vision Pro)를 통해서다. 새로운 반도체를 통해 구현한 비전 프로에 대해 팀 쿡 애플 CEO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애플 워치, 에어팟에 이어 자신이 선보인 세 번째 신제품에 대한 강한 애착이 엿보인다.
애플 WWDC를 통해 공개된 혼합현실(Mixed Reality) 헤드셋인 비전 프로에 대해 세간이 주목하는 것은 성능과 함께 가격이다. 내년 출시를 전제로 3500달러 이상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 기기. 왜 이리 비싼 걸까.
정답은 애플이 공개한 스펙상에서 알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는 별개로 비전 프로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부품의 최신 기술이 농축됐다는 평이다. 더 비싼 부품을 사용하니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비전 프로의 '뇌'인 반도체는 애플 스스로 개발한 'M2'와 새로 선보인 'R1' 두 개를 사용한다. M2는 맥컴퓨터와 아이패드에 사용되는 최신 칩이다. 비록 내년 비전 프로 정식 출시 시점에는 신형 'M3'가 등장했겠지만, M2는 여전히 강력한 시스템온칩(SoC)이다. 애플은 M2에는 전반적인 기기 구동을 맡겼고 R1에는 입력되는 정보를 다루도록 했다.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반도체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이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통해 공간 컴퓨터라는 용어를 꺼내 들었다. 기시감이 있다. 에어팟을 통해 서비스 중인 공간음향과 유사한 표현이다. 음향과 영상을 모두 공간으로 침투시킨다는 발상이다. 과연 어떻게 가능한 걸까. 새로운 운영체제(OS), 소프트웨어와 막강한 반도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전 프로가 애플 실리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기기임을 알 수 있다.
애플은 이미 에어팟을 통해 현실과 음악을 공존하게 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왔다. 에어팟 프로와 에어팟 맥스의 주변음 허용 모드다. 이 기능은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주변의 소리를 그대로 귀로 전달해 준다. 심지어 귀를 완전히 덮는 '오버 더 이어' 형식인 에어팟 맥스를 사용 중이어도 주변의 소리가 잘 들린다. 이는 H1, H2 칩이 마이크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를 처리해 즉각적으로 소리를 재생할 수 있도록 해서 가능했다. 에어팟프로2가 30만원대, 에어팟맥스가 70만원대 가격표를 달고도 잘 팔리는 데는 반도체 성능의 압도적 차이가 있기에 가능하다.
이런 경험을 기반으로 애플은 반도체의 힘을 빌어 영상에서도 비슷한 기능을 구현한다. 애플 실리콘 파워는 비전 프로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2'나 메타의 '퀘스트 프로'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성능과 기능을 가능케 하는 근간이다.
애플은 R1 칩에 대해 12개의 카메라, 5개의 센서와 6개의 마이크가 입력한 정보를 처리해 콘텐츠가 사용자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R1은 눈을 한번 깜박이는 시간보다 8배 빠른 12밀리초 안에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외에 아직 R1에 대해 공개된 자료는 없다.
R1과 M2의 조합이 카메라로 확보한 영상을 실시간 수준으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면서 지연 영상으로 인한 울렁임 증을 막을 수 있게 됐다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비전 프로는 사용자의 앞에 사람이 있으면 자동으로 사용자의 눈을 보여준다. 투명한 유리를 쓰지 않았음에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외곽이 디스플레이이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이용자의 눈을 보여주는 것이 모두 카메라를 통해 입력된 정보를 처리한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 각각 4K급 해상도의 대용량 영상을 처리할 수 있는 것도 R1이 있기에 가능하다. 애플이 강조하는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칩 성능이 필요하다.
이 기능은 비전 프로를 다른 AR, VR, MR 기기와 차별화하는 핵심이다. R1 칩이 실시간으로 영상을 처리해 주는 덕분에 비전 프로 사용자는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 장비의 가장 큰 단점인 사용 중 멀미가 나는 현상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전 프로의 경쟁 제품에 사용된 반도체는 어떤 상황일까.
메타 '퀘스트 프로'는 퀄컴의 스냅드래곤 XR2+ 1세대 칩을 사용한다. 퀘스트 프로의 스냅드래곤 XR2+ 1세대 칩은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가 기반이다. 스냅드래곤 8 1세대다. 삼성전자 갤럭시S22에 사용된 칩이다. 스냅드래곤8 1세대의 성능은 2020년 출시된 아이폰12에 사용된 ‘A14’ 칩에도 못 미쳤다.
애플은 ‘M1’으로도 이미 저전력 시스템온칩(SOC) 분야에서 경쟁사를 앞서 나갔다. 애플이 비전 프로에 ‘M2’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모바일 칩을 통해 VR 단말기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올해 하반기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 '퀘스트 프로 2'가 스냅드래곤XR+ 2세대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칩이 스냅드래곤 8 2세대를 사용하더라도 기본 성능이 지난해 출시된 M2를 추월하기는 어렵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가 애플보다 먼저 보급형 MR 헤드셋 '퀘스트3'을 선보였지만, 시장과 사용자들의 관심은 온통 비전 프로에게만 쏠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AP를 사용하고 거기에 각종 카메라와 센서에서 입력되는 정보를 처리할 또 다른 칩인 R1까지 더해지면서 메타의 기기와 애플 비전 프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를 두고 경쟁을 시작할 것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애플은 비전 프로를 통해 아이폰, 맥컴퓨터, 에어팟 등 각종 애플 기기와의 연동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존 기기와의 협력은 물론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 생성됐다. 추격자들이 따라오기 힘든 부분이다.
'홀로렌즈2'를 2019년에 선보이며 일찌감치 MR 시장에 진입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사정도 복잡하게 됐다. MS는 인공지능(AI) 시대의 기선을 제압했지만, 하드웨어 시장을 장악한 애플과의 격차는 줄이기 쉽지 않다. MS 역시 퀄컴의 칩을 통해 홀로렌즈2를 만들었지만 홀로렌즈3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중이다. 애플이 TSMC의 최신 라인을 통해 칩을 생산한 경우 성능 격차는 더 벌어질 수도 있다.
반도체를 직접 설계할 수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소프트웨어적인 성능은 강력한 반도체가 있을 때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비전 프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애플 실리콘의 위력인 셈이다.
비전 프로가 공개되기 전에도 애플 전문 매체 애플인사이더는 "애플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단말기를 내놓을 경우 메타의 VR 시장 주도권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애플인사이더는 또 메타가 VR 단말기의 심장인 AP를 타사에 의존하는 것 역시 약점이라고 평했다.
애플이 MR 단말기 시장에서 즉각 큰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다. 구글, MS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월가는 긍정적인 평가를 보냈다. 금융전문가들이 비전 프로를 보고 제시한 보고서는 부정적 평가보다는 긍정적 전망이 우세하다.
웨드부시 증권은 비전 프로 발표 후 애플의 목표주가를 15달러 높여 220달러로 제시했다. 웨드부시는 월가에서 가장 높은 목표주가를 설정한 이유에 대해 비전 프로의 가격이 2025년에는 하락하면서 제품 판매와 앱 판매 확대로 이어져 실적이 크게 상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웨드부시는 '다른 기업들이 체커스 게임을 하고 있는데 애플은 체스'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애플이 경쟁사에 비해 크게 앞서 있다는 분석인 셈이다. 크레디스위스, BoA도 목표가 상향에 동참했다. 모건스탠리는 비전 프로 출시가 애플에 '문샷(moon shot)'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플은 인텔 CPU를 자사의 모든 제품에서 제외하는 작업도 마쳤다. 이번에 비전프로와 함께 공개된 'M2 울트라' 칩은 전문가용 '맥 스튜디오'와 '맥 프로' 컴퓨터에 사용된다. 이제 애플의 모든 제품에서 핵심 칩은 애플 실리콘이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