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쇼크웨이브]⑫EUV 도입 포기 '나비효과'…美 첨단반도체 후퇴의 시작

ASML장비 도입, 반도체 업계 흐름을 바꾸다
인텔, 첨단 기술·개발자금도 내주고 정작 EUV 도입 포기
30년 전에 인텔이 뿌린 씨‥대만과 한국서 꽃 피워

편집자주[애플 쇼크웨이브]는 애플이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며 벌어진 격변의 현장을 살펴보는 콘텐츠입니다. 애플이 웬 반도체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애플은 이제 단순히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고 스티브 잡스 창업자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노력 끝에 애플은 모바일 기기에 사용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를 설계해 냈습니다. PC 시대에 인텔이 있었다면, 애플은 모바일 시대 반도체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됐습니다.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망 위기와 대규모 반도체 생산라인 설비 투자가 이뤄지는 지금, 애플 실리콘이 불러온 반도체 시장의 격변과 전망을 꼼꼼히 살펴 독자 여러분의 혜안을 넓혀 드리겠습니다. 애플 쇼크웨이브는 매주 토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40회 이상 연재 후에는 책으로 출간합니다.
따옴표"가능한지도 알 수 없는 일에 2억달러나 투자해 달라는 거요?” (앤디 그로브 전 인텔 최고경영자)“네, 이런 것이 연구입니다."(존 카러더스 전 인텔 연구개발 책임자)

인텔은 2015년 이후 10나노, 7나노 공정 도입을 연기해왔다. 이유가 무엇인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대다수 전문가가 꼽은 이유는 하나로 귀결됐다. 극자외선(EUV) 포토 리소그라피 장비 도입 지연이다. 이 장비는 ASML에서만 만든다. 이 장비가 없다면 10나노 이하 공정에서 생산된 첨단 반도체 칩을 생산할 수 없다. 첨단 공정 경쟁을 위해서는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필수품이다.

2020년까지 판매된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 절반이 삼성과 TSMC에 설치되는 동안 인텔은 지켜만 봤다. 반도체 업계에서 '슈퍼 을'로 통하는 ASML의 EUV 장비를 개발하고 생산할 바탕을 깔아준 앤디 그로브(Andy Grove)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일까.

앤디 그로브 인텔 전 최고경영자(CEO)는 1992년 EUV 투자를 위해 2억달러가 필요하다는 사내 연구 책임자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당시 결정을 추진했던 연구개발 책임자 존 캐러더스(John Carruthers)도 놀랄 정도였다. 깐깐한 그로브가 지출 결의서에 선뜻 사인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진 D램을 버리고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한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 그로브가 또다시 30년 후를 내다본 엄청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캐러더스는 당시 수준의 포토 리소그라피 기술로는 곧 한계가 올 것이라며 EUV 투자를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13.5나노미터 수준의 EUV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때다. 일본 니콘은 EUV 투자를 외면했다. 불가능한 일에 투자하지 않은 셈이다.

그로브는 어찌 보면 황당할 수도 있는 투자요청을 받고 전 CEO인 고든 무어에게 의견을 묻는다.

"앤디,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요?"

무어의 법칙을 만든 무어의 되물음에 그로브도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도체 산업은 더 좁은 선폭의 회로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경쟁이다. 설계도 중요하지만, 생산공정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반도체의 발전과 완성도를 유지할 수 없다. 손톱보다 작은 칩에 10억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기술은 마법에 가깝지만, 이 마법을 부리는 기술이 있다. 사진을 찍어내듯 설계한 회로를 웨이퍼에 그리는 노광 작업(포토 리소그라피,Photo Lithography)은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이뤄낸 결정적 기반이었다. 이 기술도 애초 미국이 개발했다. 인텔의 질주도 포토 리소그라피에 대한 이해와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텔의 고든 무어가 발표한 '무어의 법칙'도 포토 리소그라피 기술의 발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미국 포토 리소그라피 장비 업체들은 자국 반도체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상황이 변화한다. 일본 기업들이 D램을 중심으로 대공세에 나섰다. 미국 반도체 산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다. 그 배경에도 일본산 포트 리소그라피가 있었다.

ASML의 극자외선 포토 리소그라피 장비. 대당 5000억원에 달하는 몸 값을 자랑한다. 사진=ASML 홈페이지

美, 첨단 기술 다 내주고 정작 도입 포기

1986년 미국 포토 리소그라피 기업 GAC의 신제품 개발이 중단됐다. 이 회사는 결국 파산했다. 또 다른 포토 리소그라피 기업 울트라테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미국은 반도체 생산의 핵심기술인 포토 리소그라피를 잃었다.

이때 등장한 다크호스가 있었다. 네덜란드의 ASML이다. 지금은 반도체 업계의 '슈퍼을'로 부상한 기업이다. 이 회사의 장비가 없다면 10나노 이하의 반도체 공정을 완성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최신 아이폰과 갤럭시 스마트폰을 만들기 위해서는 ASML의 EUV 장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 자릿수대 나노 공정을 지원하는 포토 리소그라피 장비는 ASML의 EUV 장비뿐이다.

지금 반도체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ASML은 네덜란드 전자 및 반도체 업체인 필립스가 장비 제조사인 ASM인터내셔널과 함께 설립한 포토 리소그라피 기업이다.

ASML은 발전을 이어갔지만 일본 기업에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니콘, 캐논 등 일본 기업들이 약진하면서 겨우 10% 정도의 시장 점유율에 그치고 있었다. 이때 결정적 변수가 등장한다. 미국이 ASML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자국 포토 리소그라피 기업의 몰락 속에 일본 기업 대신 네덜란드의 ASML이 믿을 수 있는 파트너로 낙점됐다. 자국 기업의 미국 반도체 시장 침공을 측면지원한 일본 포토 리소그라피 업체에 미국의 기술을 내줄 수 없다는 인식도 한몫했다.

앞서 언급한 EUV 상용화를 위한 최초의 지원은 인텔이 시작했다. 그러나 인텔이 직접 EUV 장비를 개발할 수는 없는 일. 인텔은 미 정부 연구소에서 탄생한 EUV를 ASML에 전수하려고 했다. 정부도 고민했고 미 의회도 기술 이전에 반대했다. 첨단 기술을 해외에 내줘도 되냐는 우려였다.

인텔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ASML이 미국 포토 리스그라피 업체인 SVG를 인수하는 것을 정부가 허용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크레이그 배럿 전 인텔 CEO는 "이번 인수가 불발되면 미국의 EUV 장비 확보가 지연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힘을 보탰다.

EUV 장비가 탄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2년에는 인텔과 삼성전자, TSMC가 ASML 지분을 확보하며 EUV 개발 자금을 댔다.

이처럼 EUV 현실화를 위한 판을 깐 인텔은 정작 스스로 장비 도입을 포기했다. 첨단 공정 '메이드인 아메리카' 칩의 탄생은 그렇게 속절없이 지연됐다. 뒤늦게 EUV 장비 확보에 나섰지만, 삼성과 TSMC는 이미 한참 앞서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6월 네덜란드에 위치한 ASML 본사를 방문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와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30년 전에 인텔이 뿌린 씨‥대만과 한국서 꽃 피워

인텔은 전임 CEO가 30년 전 뿌린 씨앗을 수확하기를 포기했다. 아이폰을 거부한 폴 오텔리니에 이어 2013년 경영 지휘봉을 이어받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전 CEO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6대 인텔 최고경영자 크르자니크는 인텔의 추락에 불을 붙인 인물이다. 연구 개발 투자 축소와 개발 인력 감원은 애교 수준이다. 결정적 실수는 EUV 장비 도입 연기라는 엄청난 오판이다. 넘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반도체 선두주자였던 인텔이 후발 주자로 밀려난 이유가 여기서 발생했다. 어쩌면 그가 사내 불륜으로 2018년 사임한 것이 인텔에 긍정적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그로브가 미래를 위해 뿌린 씨앗은 30여년 만에 대만과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 그렇게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애플 아이폰의 칩은 미국에서 만들 수 없게 됐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한 대형 가전회사의 광고 문구는 지금도 소비자들의 귀에 익숙하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이 아니라 기업의 존망을 위협한다.

애플이 과감하게 ARM의 설계와 인수합병(M&A)을 통해 자체 반도체를 탄생시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애플의 모든 제품에 들어간 애플이 설계한 반도체는 자체 운영체제와 찰떡궁합으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성능을 보였고 소비자들은 환호했다. 애플은 비용은 줄어들고 매출은 늘어나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반면 인텔은 수십년간 이어오던 반도체 분야의 제왕 자리를 허무한 오판으로 날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다. '신의 한 수'가 아니라 '신도 저주한 한 수'였다. 반도체 분야에서 실수를 뒤늦게 만회하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오피니언부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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