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준기자
[아시아경제 장희준 기자] 북한이 우리나라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번 회의에 빠진 배경을 놓고서는 내세울 성과가 없는 북한의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9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17~18일 이틀간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8차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회의에선 ▲2022~2023년 과업 ▲2022~2023년 예산 ▲평양문화어보호법 채택 ▲중앙검찰소 사업 정형 ▲조직(인사) 문제 등이 논의됐다. 대체로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수순으로 평가되며, 별도의 대남·대미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이번 회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고지도자의 메시지가 언급되지도 않았다.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신분이 아닌 만큼 반드시 참석할 필요는 없지만, 주요 시기마다 시정연설 형식으로 대외 메시지를 내놓곤 했다. 지난해 9월 핵무력 법제화를 선포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불참의 배경을 두고 북한이 내세울 만한 경제 성과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북한은 이번 회의에서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지출을 전년 대비 1.7% 늘리고, 경제 분야 예산은 불과 1.2% 증액하는 데 그쳤다. 코로나19 여파로 긴축 재정에 들어갔던 만큼 북한 재정이 여전히 쪼들리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정은이 직접 등장한다는 건 업적을 보여주거나 중요한 메시지를 내놓을 필요성이 있다는 뜻인데, 이번에는 그런 (내세울) 게 없었다"며 "핵무력은 충분히 과시했고 이제 경제 문제에서 내세울 게 있어야 하는데, 예산 편성 등을 보면 북한의 현 상황은 계속 열악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특히 북한의 지출 및 경제 분야 예산 증액이 1%대에 머문 것에 대해 "코로나19 유입 전까지의 경제 수준으로 돌리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북한 스스로 보여준 셈"이라고 진단했다.
김 위원장이 불참한 이번 회의에선 새로운 정책도 제시되지 않았다. 대신 지난해부터 예고됐던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채택하고, 우리의 검찰에 해당하는 중앙검찰소 사업 정형 등을 논의, 주민들에 대한 감시·통제를 강화하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동안 법 초안에 대한 연구와 협의회 논의 등 절차를 거쳐 왔으며 이번 회의에서 전원 찬성으로 법을 채택했다. 강윤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평양문화어보호법은 우리 언어생활 영역에서 비규범적 언어 요소들을 배격하는데 대한 조선노동당의 구상과 의도를 철저히 실현하기 위한 문제들을 규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평양문화어보호법은 쉽게 말해 '남한식 말투'를 쓰지 말라고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서울 말씨나 영어식 표현들이 퍼지면서 체제 결속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만큼 남한의 드라마·영화 등 문화 콘텐츠가 주민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으며,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은 청년층을 대상으로 '남친(남자친구)', '쪽팔린다(창피하다)' 등 표현들과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행위 등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나선 바 있다. 특히 2020년 12월에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 남한 영상물 유포자를 사형에 처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평양문화어보호법 제정 내용을 보면 당의 구상과 의도를 철저히 실현한다는 등 표현이 담겼다"며 "법률 내용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평가하긴 이르지만, 전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은가 추측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선 김영철 전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주석단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점이 주목된다. 북한 원로 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하노이 노 딜' 이후 주요 당직을 내놨지만, 여전히 김 위원장의 신임을 받으면서 국정 운영에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미 협상을 주도했던 그는 지난해 6월 당 제8기 제5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대남 부서인 당 통일전선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어 같은 해 9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선 상임위원회 위원 직함도 뗐다. 나아가 지난 연말 열린 당 전원회의 당시에는 주석단에 오르지도 못해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된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다만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영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도 국무위원 자리 만큼은 유지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조선중앙통신이 "국무위원회 위원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 최고인민회의 부의장(도 주석단에 자리했다)"이라 전한 것도 국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아울러 이날 최고인민회의에선 의장직에 박인철 직총 중앙위원장, 부의장으로 대남 라인의 핵심이던 맹경일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장을 발탁했다. 맹경일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남북관계 개선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올림픽 기간 동안 앤드루 김 미국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과 함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김영철 전 통전부장 간 회담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김영철에 대한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2021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 자리가 공석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장단 운영을 정상화한 측면은 있지만, 부의장(맹경일)에 대해 특별하게 평가할 만한 특이사항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신중하게 평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