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기자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많이 그리고, 겹쳐 그리고, 또 오래 그릴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해서 작업한다”
조선시대 사관이 사초를 기록하듯, 허수영 작가는 캔버스 위에 꽃과 풀의 사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찰하고 이를 중첩과 반복을 통해 기록한다. 그의 기록은 곧 노동의 시간으로 켜켜이 쌓여 소재의 존재성과 축적된 시간으로 남는다.
허수영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에서 11월 19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2022년 근작을 포함한 작가의 회화 23점을 선보인다.
시간의 중첩성을 회화에 담는 작가는 매일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아 캔버스 위에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원에서 발견한 자연의 소재는 물론 다양한 우주의 이미지를 합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우주를 화면에 담아냈다
단순히 ‘노동집약’이란 말로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에 그 과정은 참으로 지난(至難)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방식에 대해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린다. 도감을 그릴 땐 마지막 장까지 그렸고 계절을 그릴 땐 겨울이 돼야 끝난다고 마음먹고 작업했다”고 덤덤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어 “더는 못 그리겠다 할 때까지 그렸는데도 나중에 다시 보면 더 그리고 싶어지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이번 전시에도 소개된 작품 ‘버섯(Fungi)’은 그가 버섯도감을 보고 거기에 수록된 모든 버섯을 그려 넣은 가로 390㎝, 높이 162㎝의 대작이다. 2010년 완성한 이 작품에 작가는 ‘끝낸 그림에는 다시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나비와 곤충을 덧칠하듯 그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버섯과 곤충이 빽빽하게 들어찬 풍경은 자연을 넘어선 우주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꽃과 풀, 바다와 숲 등 작가는 자신이 머무는 공간 주변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1년 동안 변화하는 자연을 작품에 쌓는 작업을 해온 작가는 그보다 더 길고 깊은 시간을 압축해서 담고 있는 우주에 주목했다. 별과 별, 우주를 겹치고 나열하며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그려낸 작가는 “우주가 회화가 될 때까지 그렸다”고 소개했다.
매일 캔버스에 자신의 시선, 그리고 기록을 붓으로 쌓아나가는 작가의 작업은 회화를 넘어선 구도자의 길을 연상케 한다. 반복된 작업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누구나, 직장인이나 일하는 모든 분이 다 힘들지 않으냐” 반문한 작가는 “화가는 세계를 묘사하지 않고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자연과 우주를 발견하고 기록하는 화사(畵師)의 구도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