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주기자
기존 디지털치료제(DTx)는 약물중독, 불안장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등 주로 정신질환에 초점을 맞춰 개발됐다. 세계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페어 테라퓨틱스의 DTx ‘리셋(reSET)’은 알코올·마약중독 등 물질 사용 장애를 적응증으로 하고 있고, 또 다른 FDA 승인 DTx인 아킬리 인터렉티브(Akili interactive)의 ‘엔데버(EndeavorRx)’는 ADHD를 대상으로 한다. 그랬던 DTx가 최근 뇌질환을 비롯한 신경질환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적응증은 치매이지만, 이를 넘어 뇌졸중 후유증과 뇌전증 등을 타깃으로 하는 DTx 개발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DTx의 무한한 잠재력이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뇌경색과 뇌출혈을 통틀어 일컫는 뇌졸중은 대표적인 뇌질환으로 꼽힌다. 뇌혈관 이상으로 발생하는 뇌졸중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졌을 때 근처 뇌 영역이 손상돼 신경학적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주로 두통, 어지럼증, 균형감각 상실은 물론이고 신체 마비로 이어져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게 만든다.
뇌졸중 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28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국내 뇌졸중 환자 수는 2017년 57만명, 2018년 59만명, 2019년 61만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60만명대로 감소했다가 지난해에는 62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사지마비나 시력 손상 등 심각한 후유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뇌졸중 DTx는 주로 환자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해 8월 FDA는 뇌졸중 환자 신체 일부의 불편한 움직임을 돕기 위한 DTx인 ‘VNS’ 재활 시스템을 승인했다. 뇌졸중을 적응증으로 하는 최초의 DTx로, 전기펄스를 보내 자극을 주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뉴냅스의 DTx ‘뉴냅비전’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뉴냅비전은 뇌졸중으로 생긴 시야장애를 치료하는 가상현실(VR) 기반의 DTx다. VR 기기를 착용한 환자에게 30분씩 특정 자극을 보내면 환자가 게임을 하듯 자극을 판별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2019년 국내 DTx 업계에서는 최초로 임상시험계획을 승인받아 현재 서울아산병원 등에서 확증임상을 진행했다. 뇌졸중 환자의 약 20%는 시야장애를 겪고 있는 만큼 개발에 성공한다면 수요도 클 것으로 보인다.
과거 ‘간질’로 불렸던 뇌전증도 DTx를 적용할 주요 적응증으로 떠올랐다. 뇌전증은 발작을 일으키는 뇌질환으로, 국내에서 연간 14만명의 환자가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SK바이오팜이 뇌전증 DTx 시장 진출을 추진하는 모습이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혁신 신약 ‘세노바메이트’ 개발에 성공하는 등 뇌전증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9년 미국 FDA 허가를 받은 세노바메이트는 지난해 미국에서만 80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신약을 넘어 뇌전증을 예측하고 감지하는 DTx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계획이다. 지난 3월 조정우 SK바이오팜 사장은 "뇌전증 예측·감지가 가능한 웨어러블 뇌파(EEG) 의료기기 개발 시제품을 개발하고 연내 국내 임상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DTx 벤처와의 관계 구축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SK바이오팜은 지난달 미국 DTx 기업 칼라헬스(Cala Health)에 투자하고 뇌과학 분야에서의 기술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SK바이오팜이 올 하반기에는 DTx와 관련한 추가적 움직임이 있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한미약품은 KT와 함께 가톨릭대 기술지주사인 디지털팜에 합작 투자하는 방식으로 DTx 분야에 진출했다. 디지털팜이 파이프라인을 발굴하면 KT가 플랫폼 개발, 한미약품이 사업전략과 마케팅 등 전문 분야를 담당한다. 우선 알코올·니코틴 등 중독 관련 DTx와 ADHD 분야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웅제약도 DTx 사업 협력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최근 대웅제약은 ‘이노베어 창업스쿨’ 공모전을 개최해 미래 전략적 파트너 4곳을 선정했는데, DTx 개발 기업인 뉴다이브가 포함됐다. 뉴다이브는 국내 최초로 발달장애 비대면 원격치료를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구현한 DTx 개발 기업이다. 또 경상남도와 함께 바이오 스타트업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공모전에서도 DTx를 모집 분야에 포함하는 등 오픈 이노베이션을 추진 중이다.
제약업계 차원의 DTx 논의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디지털 헬스케어 전반을 다룰 ‘디지털헬스위원회’를 신설했는데,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바로 DTx이다.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이미 해외에서 디지털헬스가 진행되고 있고, 미래에 상당한 각광을 받을 것"이라며 "위원회가 정부와 제약사, 스타트업을 매칭하고 각 주체를 잇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DTx가 뇌질환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수의 DTx 임상을 수행하고 관련 특허를 보유하는 등 국내 DTx 권위자로 꼽히는 한덕현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뇌·정신과 디지털은 알고리즘 측면에서 기본 원리가 비슷하다"며 "디지털을 통해 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매우 잘 맞는 만큼 뇌질환을 중심으로 DTx의 개발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관주 기자 leekj5@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