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동의합니다/김수목

밤늦은 전철역에서 그 노파를 만난 것은저의 불찰입니다종이 상자를 뜯어 엉덩이 밑에 깔고신문지 쪼가리로 몸을 감싸고 있었습니다너무 늦은 밤이었고수은등이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탓도 있었습니다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전부를 노파의 손에쥐어 준 것은 더 큰 불찰이었습니다어디 사면의 방에라도 가서 쉬시라고 했습니다어느 찜질방이라도 가서 몸을 뉘이시라고 했습니다며칠 후 다시 밤늦게 귀가한 것도저의 불찰입니다더 늦은 밤이었고 행인도 끊겼지만여전히 그 노파는얼마 전의 행색과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대책 없이 살고 있는 매일의 내가,남의 관심을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내 주머니 속의 전부를 내주었던 것처럼누군가가 내게 모든 것을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노파의 눈과 마주쳤을 때,싸늘한 한기가 나를 밀어냈습니다밤늦은 귀가는 이제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시는 다 읽고 나면 뭔가 좀 불편하다. 마지막 연 때문이다. 유난히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아마도 "밤늦은 귀가"를 "이제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시인을 향해 그러하기에 더욱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강변하였을 것이고, 극히 현실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저 "싸늘한 한기"를 들어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었을 것이다. 이 둘은 극과 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노파"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희한하게도 통한다. 어쨌든 그들에게 "노파"는 연민 혹은 냉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기껏해야 "주머니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린 것이 전부였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노파"를 "싸늘한 한기" 속에 버려 둔 채 득의만만하게 따뜻한 집으로 돌아간 것은 실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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