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다르크' 추미애 vs '정치 9단' 박지원…'DJ 적자' 놓고 설전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미지출처=연합뉴스]

‘문준용씨 특혜 취업 제보 조작’ 사건을 둘러싸고 시작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 간 설전이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적자' 공세로까지 번졌다. 설전의 시작은 추 대표였다. 추 대표는 지난 6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민의당 대선 제보 조작 사건에 대해 "그 당의 선대위원장이었던 박지원 전 대표, 후보였던 안철수 전 의원이 몰랐다 하는 것은 머리 자르기"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추 대표 발언에 국민의당은 국회 일정 보이콧을 선언을 하며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추 대표는 한 발 더 나갔다. 7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당의 대선 조작 게이트는 일찍이 북풍 조작에 버금가는 것으로, 당 시스템이 전격적으로 풀가동되어 유포시킨 것"이라며 "그런 사실과 결과의 후폭풍을 용인한다는 것은 형사법적으로는 미필적고의"라고 비판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어 10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박지원 전 대표와 이준서 전 최고위원 간 36초 통화를 언급하며 "최종 컨펌을 하는 시간은 36초로 충분하다"면서 "김대중의 적자라는 박지원 전 선거대책위원장께 양심에 따른 행동, 정치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정치 9단’ 이라 불리는 박 전 대표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자신의 페이스북,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추 대표에 대한 맹비난을 쏟아냈다. 박 전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추 대표의 이성 회복을 촉구하며 담당 검사의 역할은 담당 검사에게 맡기고 집권여당 대표의 역할만 하길 촉구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또 "참으로 다행인 것은 추 대표가 일찍 사법부를 떠난 것"이라며 "만약 사법부에 남았다면 이런 편향된 시각으로 집권여당 망가뜨리듯 사법부까지 어떻게 되었을까 끔찍하다"고도 했다. 이어 "36초 통화가 추 대표의 추측, 예상과 다르더라도 국민의당과 저 박지원은 죽어도 좋다는 허위사실을 미필적고의로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또 추 대표가 작년 총선에서 허위사실 유포로 8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것, 2007년 대선 당시 BBK 의혹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내로남불'이라며 반박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저는 추 대표만큼 바보 박지원이 아니다"라며 "여당 대표가 검사 연습 마시고 DJ 딸이라고 자랑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시라. 지금처럼 여당 대표 하시면 대통령께서 한 자리 안 주시고 자리가 바뀐다"라고 비난했다.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연설 장면[이미지출처=연합뉴스]

◆누가 DJ 적자일까…박 전 대표와 추 대표 모두 DJ가 여의도로 캐스팅해 대구 세탁소집 셋째 딸로 태어난 추 후보는 사법고시 합격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남인 전북 정읍 출신 남편과 결혼했다. 이로 인해 추 대표는 '대구의 딸이자 호남의 며느리'로 불리게 됐다. 1995년 초 대표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전문가 수혈 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한 추 대표는 1997년 대선 때 이른바 '잔 다르크 유세단'을 이끌면서 높은 대중성에 강한 돌파력, 추진력을 보여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15~16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 직설적이고 매서운 의정활동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 당내 개혁적 소장파 그룹인 '푸른정치모임'의 일원으로서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과 함께 정풍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2년 대선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선대위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이끌며 '희망돼지 저금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 국민성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정치 9단' 박지원 한편 박 전 대표는 대학 졸업 후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미국에 건너가 1972년 11월 주식회사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에 임명됐다. 이후 사업을 해 크게 성공했고 이 기간에 정치적 망명 인사였던 김대중의 생활비를 댄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인 정계 입문은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이후 타고난 언변을 바탕으로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청와대 비서실장, 공보수석,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문화관광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이런 이유로 흔히 박 전 대표를 김 전 대통령의 ‘입’이라고 부른다. 목포에 지역구를 둔 박 전 대표는 ‘금귀월래(金歸月來, 금요일 저녁 지역구로 돌아가 월요일 새벽에 서울 국회로 돌아옴)’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오랜 대변인 경력을 바탕으로 기자들의 전화를 놓치지 않는 습관도 유명하다. 또 3번의 원내대표를 하면서 상대 당과 협상을 이끌어내는 모습에서 ‘정치9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영원한 비서실장’을 자임하던 그는 뿌리인 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으로 자리를 옮겨 ‘상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다.아시아경제 티잼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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