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인호 기자] 이맘때면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아버지는 공휴일이 아닌데도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아버지는 양복 대신 울긋 불긋한 등산복에 배낭을 멘채 잠든 나를 깨우곤 했다. 아버지가 졸린 눈을 뜨지도 못한 나에게 "우리 등산 같이 갈래"라며 환한 웃음을 짓던 모습이 지금도 뚜렸하다. 나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땐 잘 몰랐다. 아버지가 매년 이날 출근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어린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동절(메이데이)이었던 것 같다. 이렇듯 어릴적 노동절에 대한 기억은 따뜻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노동절의 역사를 접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노동절의 역사가 피와 투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지난 1886년 5월1일 미국노동총동맹이 하루의 노동 시간을 8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가진 시가행진과 농성에서 34만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행사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그러다 이틀 후인 3일 '맥코믹 농기계 공장'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중 6명이 경찰의 총에 죽으면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폭력적인 상황으로 전개된 것. 항의 집회에서 갑자기 폭탄이 터져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고, 경찰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폭탄 테러 배후자로 검거했다. 5명은 교수형, 3명은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교수형을 선고받은 5명 중 1명은 사형 집행 전날 자살을 했고, 4명은 사형 집행으로 죽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국제노동자협회는 다음해인 1890년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절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노동절을 공산당의 선전도구로 무시하면서 지난 1958년에는 날짜를 3월10일로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노동절이라는 이름 마저 듣기 싫어했다. 그는 지난 1963년 '근로자의 날'로 변경했다. 지금의 노동절로 다시 돌아간 것은 1994년 이다. 노동자들이 합법적인 시위와 투쟁으로 30년 만에 자신들의 날을 되찾은 것이다. 오는 9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대선 후보자들은 매번 대선에서 그러했듯이 정치적인 성향에 맞는 노사 정책을 내놓고 있다. 보수 성향 후보자들은 기업친화적 정책, 진보 성향 후보자들은 노동친화적 정책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물론, 같은 보수 성향, 진보 성향 후보자간 미세한 정책적인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크게 바뀌거나 다른 점을 찾아 보기 힘들다. 여기서 어떤 노사 정책이 옳고, 틀리다는 것을 논하고 싶진 않다. 다만, 평소엔 노동자 권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표심을 노리고, 노동자 운운하는 그런 정치인 만큼은 꼭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유인호 기자 sinryu007@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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