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지난 연말, 저녁 식사를 마치고 11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겨울 하늘을 쳐다보았다. 짚은 감색 빛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비가 내릴 것 같았다. 손톱만한 초승달과 샛별 하나가 "여기가 하늘이예요" 겨우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아래, 대단지 아파트의 생활공간도 수 십 개의 가로등 불빛만 켜 있을 뿐 썰렁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도 적었다. 연말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가정 경제에서부터 정치, 경제, 문화 등 어려웠던 환경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TV에서는 서울 시청 앞 촛불 집회가 마치 축제처럼 방영되고 있었다. 시청과 광화문은 '아고라'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필자가 마주한 인천의 연말 풍경은 그렇게 침울했다. 세월은 '우사인 볼트'의 100m 경주처럼 저돌적으로 빨리도 흘렀다. 몇 명의 해외 주재 근무자들이 인사차 찾아와서도 맥 빠진 소리뿐이었다. 그랬다. 지난 한 해는 가슴 한 번 터놓고 큰 소리로 웃어 본 적이 별로 없다. 일명 '배철수' 산업의 침몰과 함께 많은 동료와 후배들을 직장에서 떠나게 했다. 죄인인 양 어깨를 떨구고, 망망대해에 일엽편주처럼 내동댕이쳐진 뒷모습들이 빛바랜 신문의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가슴 아프게 남아 있다. "형, 저 이제 어떡해요. 큰 놈이 이제 고3인데..."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떠밀린 후배는 처절하게 떨고 있었다. 필자가 건네는 술잔을 거푸 들이켜더니 결국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흐르는 굵은 눈물을 애써 감췄다. 내게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얻어 보려다 그만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선배에게 일자리 부탁을 하지만 막막한 현실 앞에서 후배는 무너졌다. 가슴이 아팠다. 칼로 맨살을 베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안아 주어도 후배는 축 늘어졌다.살아남은 이들도 작은 가슴으로 살아왔다. 구조조정이 있을 때마다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하면서 많은 직장인들은 아내와 자식, 그리고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금니 꽉 깨물고 발버둥 치면서 살아왔지만 민생고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하여 '순실'이라는 이름자가 온통 나라를 카오스 상태로 만들고 있으니, 오죽하면 2016년을 빨리 지워 버리고 싶다고 입을 모을까…. 또 한 해를 보내고 세모를 맞는 첫 머리에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지만 붓끝이 저 먼저 알고 한숨을 토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시작이다. 새해 첫 날, 지는 해라도 보자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친구 넷이랑 태안반도를 돌아봤다. 한적했다. AI여파 때문인지 서해안 지방은 몹시 썰렁했다. 젊은 남녀 몇 쌍의 나들이가 보였지만 서해 바다는 맥없이 숨죽이고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의 환대 때문에, 관광객이 없기 때문에 한적하게 쓴 소주를 마셨지만 그것만으로 다부진 새해의 각오는 들지 않았다. 술은 내가 먹었는데 취하는 건 바다가 먼저라던 이생진 시인의 '성산포' 시가 자꾸 떠올랐다. 밤늦게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친구들과 다시 2017년을 씩씩하게 시작하자고 파이팅을 외쳤다. 아직 몹시 추운 겨울이 오기도 전이지만 그냥 봄이 기다려진다. 경제를 일으켜줄 봄의 전령이 기다려진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따듯할 것이므로 봄은 일찍 오겠다는 생뚱맞은 기대를 해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빛은 따듯한 봄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므로, 연말에 보았던 샛별 하나가 컴컴한 하늘을 밝혀준 것처럼 모두의 따듯한 마음이 뭉쳐 '경제의 봄'도 오고, 가정의 봄도 얼굴을 디밀어, 지난해 실직한 후배가 새 직장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등장하기를 또 기대한다. "애비야 올해도 그저 건강하게 행복하거라"는 구순 노모의 말씀처럼 올 한 해는 모든 이들이 행복했으면 정말 좋겠다. 더하여 "아버님 올해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잘 되시길 빕니다"라는 며느리의 문안 인사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 싶다. 2017년 한 해 동안 크고 넉넉한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한반도에 건강한 빛을 내리 쪼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우리에게 봄은 그렇게 올 것이다. 희망을 갖자. 김종대 철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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