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 박사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대한민국은 지금 한강의 기적을 넘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 6주 전부터 시작된 평화로운 촛불 시위는 ‘자발적’으로 모인 수백만 명의 인파가 어우러져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서사시를 연출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10월24일, JTBC 보도를 통해 지난 4년간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사람이 희대의 사기꾼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씨의 딸(최순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개됐다.. 그동안 국민들은 삼류로 분류하기에도 과분한 부패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 또 이들과 결탁한 재벌 총수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숱하게 접해왔다. 자연 정치권 비리와 정경유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면역성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몰상식하고 부도덕한 최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국가의 대소사를 지시 받아 부적절하게 운영해왔다는 웃픈 현실을 알게 된 국민들의 분노는 230만 촛불 시위로 표출됐다. 국가 원수는 그 나라의 품격을 상징한다. 박대통령의 위신이 추락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격도 땅에 떨어졌다. 국민들은 어쩌다 이 정도로 무능하고 무지한 대통령을 뽑았던 것일까. 현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 국민들 가슴 속엔 분노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등 헌법상 의무뿐 아니라 사실상 국가의 모든 공적인 업무에 관해 ‘무한(無限) 책임’을 지는 존재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사과문을 통해 보여준 대통령의 태도는 초지일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주변을 탓하면서 피해자인 국민을 향해 이해를 구하는 모습이다. 참으로 미성년자나 미성숙한 성인이 보여주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현재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비난과 실망은 극에 달한 상황이며 법적인 심판이나 거취 문제도 조만간 확정될 것이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박대통령은 역사 속 인물로 정치 현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미래의 정치 지도자를 잘 선택하는 일이다. 훌륭한 정치인은 인격과 능력이 출중하고 국민과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활용하면 후보자간 비교를 통해 우열은 가늠할 수 있다. 좋은 지도자를 뽑기 위해선 우선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이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설사 나와 혈연·학연·지연으로 얽혀져 있더라도 공동체의 이익을 해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은 배제해야 한다. 그래야 현재와 같은 지역 정당이 배출한 구악 정치인을 청산할 수가 있다. 물론 가까운 사람의 부적절한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때론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품었던 희망이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데 이런 생각이 강렬해질수록 진실 자체를 덮고 부정(denial)하는 단계에 이른다. 불의를 저지른 정치인을 미화하면서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괴로운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는 정신적 방어기전이 작동한 탓이다. 후보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된 채 저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희망 사항이나 이익을 위해 좋은 일만 선택적으로 뇌에 저장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정성이 보장되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부정부패와 연루된 현대판 부역자 명단을 만들어 누구나 공람할 수 있게 하는 게 좋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라 데이터만 확보되면 내용을 공유하고 확산 시키는 일은 어렵지가 않다. 유권자의 분노를 자극하면서 극단적인 발언을 즐겨 하는 사람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조화롭게 화합시켜야 하는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가 않다. 극단적인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심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중용(中庸)의 미덕을 강조하고 불교에서 중도(中道)의 진리를 추구하는 이유도 화합과 조화를 이룬 인간상을 이상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적으로 양 극단은 빛과 그림자에 해당한다. 즉 한 몸이지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 예컨대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극좌파로, 또 극좌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극우파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민들이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을 밑거름으로 보다 나은 정치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황세희 국립의료원 공공보건연구소 실장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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