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근현대 과학史 발자취 다뤄무사계급, 전쟁 유리한 '洋學' 관심 커서양 따라잡는데 군사력 필요성 인식전쟁 배후부터 군부 협력 과학자 분투
'천재와 일본의 괴짜 과학' 표지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리그 우승소식이 뭉클한 건 팀의 중심에 있던 투수 구로다 히로키 덕분이다. 그는 히로시마에서 데뷔해 잘 나가던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최고 무대에서도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재계약 시기가 됐을 때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 여러 구단의 제안을 받았지만 그의 선택은 친정팀 히로시마였다. 그리고 전 시즌을 상당수 소화한 올해 만년 하위팀을 정상에 올려놨으니, 만화에서나 볼 법한(실제 그의 미국 진출을 소재로 한 만화도 있다) 컴백 스토리는 일본 전역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분야는 다르지만 시대를 100년 이상 앞선 19세기 후반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1885년 전 세계 세균학을 주름잡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던 베를린대학 로베르트 코흐의 연구실에 들어간 그는 유럽 어떤 연구진도 성공하지 못한 파상풍균을 찾는 데 몰두했다. 수차례 실패 끝에 성공한 기타사토는 세균도포에 이어 치료법까지 발견했다.이후 코흐 교수의 권유로 비슷한 연배의 독일 출신 베링과 함께 디프테리아 균을 정복했다. 기타사토는 혈액에서 항독소 혈청을 추출해 다른 개체에 쓴 방식을 썼는데, 이는 현재 면역요법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이후 연이어 미지의 세균을 발견하면서 영국과 미국 등에서 고액연봉에 정교수 임용을 타진했으나 그는 조국을 택했다. 그의 나이 마흔 즈음이었을 때다. 유학 시절 같은 일본인 동료의 연구를 학술적으로 비판한 이력때문에 정작 일본에 돌아와서는 정부와 주류 학계의 냉대를 받았지만 그의 선후배 동료가 물밑에서 지원한 덕에 그는 따로 전염병연구소를 열 수 있었다.
일본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니시나 요시오.
다시 시계를 현재로 돌려보자. 해마다 10월이면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노벨상 얘기다. 일본 도쿄공업대의 오스미 요시노리 명예교수가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으면서 해당 분야에서 일본인으로는 세번째 수상자가 됐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를 쓴 고토 히데키는 20세기 초 첫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기타사토가 될 수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고토는 올해 노벨상을 받은 오스미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신경생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로 있다.지금도 여전하지만, 생리의학분야는 다른 노벨상 분야인 물리나 화학보다 유럽 등 선진국과의 격차가 더 컸음에도 기타사토의 업적은 노벨상을 받기 충분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기타사토와 같이 디프테리아 혈청요법을 연구한 베링은 해당 논문의 1저자로 등록돼 1901년 첫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베링의 연구는 상당 부분 기타사토의 도움을 받았지만, 유럽 현지에서 정치적으로 움직이기 수월했던 베링이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고 저자는 전했다.전 세계 각국의 노벨상 수상이 전해지는 요즘 자주 나오는 얘기가 '왜 한국은 받지 못하는가'다. 특히 이웃 일본이 최근 수년간 잇따라 수상자를 배출하자 '자괴감'은 더해지고 있다. 일본은 2000년대 들어 올해까지 16명의 수상자가 나왔다. 미국(55명)에 이어 단일 국가로는 두번째로 많다. 지난 2001년 일본 정부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계획을 밝히면서 "앞으로 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을 내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벌써 절반을 이뤘다.정부 국책과제 위주로 하는 톱다운 방식의 연구, 기초연구에 인색한 채 단기간 내 성과에 급급한 경직된 환경 등 우리나라 과학인이 처한 여건에 대한 분석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기술연구소 소장은 "중장기적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원이나 인력양성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아 일선 현장의 연구인력이 국내에서 연구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학창시절 상위권 성적의 이공계 학생이라면 의대에 진학한 후 번듯하게 개업하는 게 첫 손에 꼽히게 된 현실은 우리의 씁쓸한 단면이다.서양이 열어젖힌 근대의 총아는 단연 과학이다. 일본이 같은 아시아권에 있는 조선이나 중국보다 근대과학을 빨리 받아들인 건 국력을 키우고 싶은 지배계층의 욕구가 컸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 설명이다. 아시아 각국이 서양으로부터 침략당하는 걸 목격하면서 군사력을 키워야한다는 목적도 분명해졌다.여기에 일왕과 정치적 파벌이라 할 수 있는 각 번이 일방적 독재가 아닌 유기적인 관계였던 데다 무사계급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양학에 관심이 많았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서양과 경쟁할 만한 수준에 올라섰고 이후 1949년 들어 첫 노벨상을 받은 배경이다.
1917년 설립된 '일본 노벨상의 산실' 이화학연구소.
1917년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창립을 주도한 다카미네 조키치가 한 얘기는 100년이 지난 한국사회에도 유효하다. 그는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쪽은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이라며 "그러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관이 협력해 설립된 이 연구소는 이후 일본의 기초과학을 이끌며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다수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 데 일조했다.근대 일본 과학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간의 관계도는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 기타사토가 주축이 된 전염병연구소에 어느 날 미국의 세균학자 사이먼 플렉스너가 찾아왔다. 그때 연구소 직원으로 있던 노구치 히데요는 그 때 친분을 계기로 미국 유학에 오른다.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일본 지폐 1000엔짜리에 얼굴을 박고 여전히 일본 대중에게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그 노구치다.우리와도 직접 관련된 전쟁의 배후에서 군부에 협력하거나 혹은 괴로워했던 과학인과 의사, 같은 일본 내에서의 노벨상 경쟁, 근래 있었던 후쿠시마 사고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건네는 저자의 이야기는 딱딱하기 쉬운 과학사(史)를 한결 부드럽게 한다. 다만 우리에겐 낯선 일본인 이름의 과학자가 곳곳에서 등장하고 중간중간 어려운 과학이론에 대한 설명이 나온 까닭에, 과학에 조예가 얕은 나 같은 독자라면 꼼꼼히 되짚어가며 읽어야 할 테다. 책 뒷쪽 주요 인물에 대한 간략히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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