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속어 속에 숨은 세상의 우행과 진실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따까리는 속어일망정 순 우리말이다.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되어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심부름이 아닌 비서 역할이나, 업무 대행 노릇도 포함된다.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주인을 상징하는 역할이기도 하며 주인의 심복 구실이기도 하기에, 역할로만 보자면 '주인과 동급'의 일을 해주는 동지이다. 따까리란 표현에는 물론 심드렁한 시선과 비아냥이 숨어있지만, 따까리와 그 따까리의 주인 간에는 '총애'가 흐른다.어감에 이미 하찮은 뉘앙스가 감도는 이 말은 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종잡기 어렵다. 영남 지역 방언에 딱지나 껍질을 따까리라고 부르는데, 그 말의 상징성이 강화되어 인간 관계 속의 역할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잡은 것이 아닐까. 상처에 앉은 딱지도 따까리라고 하고, 뚜껑도 따까리라고 부른다. 상처에 앉은 딱지의 경우, 함부로 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병의 뚜껑 또한 병의 내부와 교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니 요긴한 역할이긴 마찬가지다.남의 따까리가 된다는 건, 그러나 '자아'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 역할에 가깝다. 자아를 버리는 대신 중요한 타자를 자아 속에 들어앉혀 타자의 존재를 확장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세상에는 이런 따까리 역할을 영 못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감관과 촉수가 발달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따까리의 명수들은 대개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임을 크게 받아 그 주인공의 치하에서 어느 정도까지 출세가 보장되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서도 그렇고 관가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권력의 중심부인 국회나 청와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비서관'이란 이름의 구실들이 대개 비칭으로 말하면 따까리 역할에 가깝다. 비서관을 둔다는 건, 그만큼 주인공의 역할이 중대하고 그 결정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따까리는 대개 따까리로 살다 가는 경우가 많지만, 주인공의 총애를 많이 받은 경우는, 큰 자리로 나아가 따까리가 아닌 본체가 되는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따까리 역할이 다만 삶의 기회들을 열심히 포착하고 책임감을 발휘한 결과였으며 그것은 본체가 되기 위한 코스프레였다면, 더없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제 따까리는 깃털이 아닌 몸통이 될 것이다.그런데, 따까리로서는 능수능란했지만, 본체의 주체성과 깊은 사려와 높고 넓은 통찰을 갖추지 못하고 의심만 많고 자아만 들어차서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전횡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따까리로 머물러야할 운명이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을 때, 그 출세의 저주를 받는 셈이다. 스스로 세상의 고독한 결정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자리에서, 따까리는 따까리 시절과는 전혀 다른 우행과 편협과 독선으로 치닫기 쉽다.그는 원래 단독자가 아니었기에, 단독자의 기본을 갖출 기회가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따까리와 본체를 구분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탓하기에는 그 민폐가 너무 큰 경우가 많다. 역사 속에서 숱하게 나타나는 따까리의 비극을 때론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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