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먼발치에서 바라 본 그는 언제나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며 바로 옆에 서있는 '흉폭한 그 남자' 기타노 다케시보다 확실히 뭔가 더 있어 보였다. 그는 좀처럼 선글래스를 벗지 않았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처음 보면 오만하게 보일수도 있을 거라고 내가 괜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핸드프린팅을 마치고 행사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위를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 나왔다. 5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992년 칸느.(여기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에 특별상이 주어졌다.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레드 카펫을 밟고 올라가 트로피를 들고 그를 기다리는 이사벨라 로셀리니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특별상은 그에게 서구 최고의 영화제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예의를 표한 것이지만 그의 영화가, 그리고 이란이라는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점점 난삽한 기교와 형식주의에 빠져드는 세기말의 현대 영화들 사이에서 그의 영화는 새로운 선언처럼 들렸을 것이다. 필력은 짧고 지력은 가벼우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수사를 빌려 말하는 것이 빠르겠다. 영화의 최전선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데이비드 그리피스 감독에서 시작하고 키아로스타미에게 도달해서 끝이 난다."고 말했다. 일본 영화의 천왕 구로자와 아키라는 "하느님은 사트야지트 레이를 데려 갔지만 키아로스타미를 우리에게 데려다 놓았다."고 말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서양에서 태어나고 발전한 영화의 수사학을 단숨에 건너 뛰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영화를 만나게 하고, 비직업 배우와 자연 조명으로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그의 영화는 이란의 척박한 현실과 그 현실을 담아내는 영화라는 예술 매체에 대한 성찰과도 같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재로 존재하는 이란 사람들이며 붉은 땅과 구불구불한 길, 나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배경으로 한다. 대개의 영화감독들은 카메라와 스토리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영화 속에서 소멸시킨다. 이러한 소멸은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이며 급기야는 그 간극마저 지워버린다. 그는 테헤란 출신으로 미술을 전공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많은 광고 필름을 만들었다. 이란의 청소년 지능개발센터에 취직한 그는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친구에게 공책을 전해주기 위해 헤매는 아이의 캐릭터와 그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 때부터 완성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지진으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을 찾아 현장으로 향하는 노감독의 근심과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여인의 뒤를 따라 숲 사이를 걸으며 구애를 보내는 선량한 사내의 모습은 그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영화가 아니라 마음의 영화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2002년에는 '텐'으로 새로운 영화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키아로스타미는 한 세계를 열고 죽음으로써 그 세계 속으로 돌아갔다. 영화의 기술은 진보하지만 영화의 예술은 진보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하나의 세계로 존재할 뿐. 굿바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1940년 6월 22일~2016년 7월 4일 ) 임훈구 편집부장 keyg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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