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우리나라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의 절반가량이 이른바 '고용세습' 등을 포함한 위법ㆍ불합리 협약으로 파악됐다. 특히 이 같은 조항은 전체 근로자의 10% 상당인 대기업ㆍ정규직 부문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다음 달부터 협약 개선지도에 돌입하는 한편, 불이행 시 사법조치까지 강행한다는 방침이다.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28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이 같은 내용의 '단체협약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위법ㆍ불합리한 단체협약이 청년 구직자들의 공정한 취업 기회를 박탈하고 노사관계 질서를 훼손하고 있다"고 밝혔다.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100명 이상 유(有)노조 사업장의 단협 2769개 가운데 42.1%인 1165개가 위법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 인사경영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단협은 13.3%인 368개로 파악됐다. 이 장관은 "위법하거나 불합리한 내용을 하나라도 포함한 단협은 1302개로 전체의 47.0%에 달한다"며 "10% 대기업 정규직 부문에 위법ㆍ불합리한 조항이 대부분 들어있어 노동시장 격차 확대, 고용구조 악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헌법과 법률의 취지를 벗어난 일부 정규직 노조의 지나친 조직 이기주의"라며 "10% 이익을 위한 90%의 희생이라는 구도"라고 덧붙였다.
위반 내용을 살펴보면 사측이 타 노동조합과는 교섭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교섭단체 조항이 28.9%(801개)로 가장 많았다. 장기근속자ㆍ업무상 재해자 자녀 등을 우선 채용하도록 하는 고용세습 조항은 694개(25.1%) 단협에 포함됐다. 이밖에 노조 운영비 원조(9.2%, 254개), 단체협약 해지권 제한(14개, 0.5%) 등이 있었다.위반율을 상급단체별로 살펴보면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이 47.3%(355개)로 가장 많았고, 규모별로는 300∼999인 사업장이 47.0%(331개)다. 위법은 아니지만 인사ㆍ경영권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등 불합리한 규정을 담은 단체협약은 368개(13.3%)로 조사됐다. 기업 분할 합병, 휴폐업, 신기술 도입, 조합원 징계해고, 하도급 결정 등의 상황에서 노조의 동의 또는 합의를 받게끔 하는 조항이다. 정부는 4월부터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협 시정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1차 자율개선, 2차 시정명령에 이어 불이행 시 사법조치한다. 이 경우 최대 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 장관은 "노조는 미취업 청년, 중소기업ㆍ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진정으로 배려해 단협 시정에 나서야 한다"며 "(시정 시)주요 기업들은 급변하는 환경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되고 근로자 고용안정, 청년채용 확대 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정부가 노조 단협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는 위법내용을 포함하거나 인사ㆍ경영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기업경쟁력과 고용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실태조사를 통해 자율개선을 유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일각에서는 4ㆍ13 총선을 앞둔 '노조 흠집 내기', '편파적 재계 편들기'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정부가 문제로 삼은 내용 대부분이 경영계 입장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정갈등이 또 다시 극한으로 치닫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특히 정부는 2월 청년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인 12.5%에 달하는 상황에서 고용세습, 현대판 음서제로 비판받는 '우선ㆍ특별채용 조항' 등에 대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선ㆍ특별채용 조항이 포함된 단협은 4개 중 1개꼴(25.1%, 694개)이며, 대기업일수록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300인 미만 기업의 위반율이 20.4%(1722개 가운데 351개)인 반면 1000인 이상 기업은 35.1%(342개 가운데 120개)에 달했다. 대기업의 경우 10곳 중 3∼4곳에서 고용세습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세부적으로는 업무상 사고ㆍ질병ㆍ사망자 자녀(또는 피부양가족)에 대한 우선ㆍ특별채용이 505개(72.8%)로 파악됐다. 이어 정년퇴직자 자녀(442개, 63.7%), 업무외 사고ㆍ질병ㆍ사망자 자녀(117개, 16.9%), 장기근속자 자녀(19개, 2.7%), 노조가 추천하는 사람(5개, 0.7%) 순이다.다만 산업재해 질병ㆍ사망자 자녀의 우선채용 등 일부 조항의 경우, 고용세습이 아닌 근로자 보호 및 복지의 큰 틀에서도 읽힐 수 있어 논란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고용정책기본법 상 취업기회 균등보장 규정에 위반되고 다른 구직자의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해 판례도 위법으로 보고 있다"며 "단협 규정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재해자 자녀에 대한 배려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이처럼 정부가 단체협약 개선지도에 박차를 가하는 까닭은 고용경직성을 해소해야만 일자리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선두에 선 것은 고용세습에 대한 비판이지만, 노동계의 반발 속에 발표한 양대지침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용부가 불합리한 단협의 사례로 언급한 '정리해고 시 노조합의', '회사매각, 합병, 양도, 공장이전 시 조합원의 근로조건 불이익 변경사항 노사합의' 등의 내용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갖추면 노동자의 동의 없이도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양대지침의 내용과 동일하다. 하루라도 더 빨리 양대지침을 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한 행보인 셈이다.노동계는 고용부의 이 같은 방침이 '편파적 사용자 편들기'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을 통해 "불법적인 단체협약 비중이 매우 높은 것으로 치장해 정당하고 합법적인 단체협약에 대한 시정지도 빌미를 만들고 있다"며 "정부 2대 불법 행정지침에 따라 부당한 인사조치와 쉬운 해고를 현장에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발했다.민주노총 관계자는 "산재 피해에 따른 우선채용도 마치 특권적 고용세습 사례인 양 분류한 부풀린 자료"라며 "사측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내용들만 가득하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항에 대한 개선 유도는 없다"고 꼬집었다.이 장관은 "위법하고 불합리한 단협이 개선되면 주요 기업들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돼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고, 이를 통해 현재 재직중인 근로자의 고용안정은 물론, 청년채용 확대와 대·중소기업 상생의 길이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한편 그는 최근 두산모트롤의 면벽근무 논란,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갑질 논란 등에 대해서 "전국 47개 지방관서에 기업이 근로자에게 모멸감을 주며 부당한 퇴직을 압박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며 "정확한 내용에 대해 실태조사 중"이라고 설명했다.세종=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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