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 그곳에 그렇게 늘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을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어찌 보면 나이란 것을 먹어가면서 무심했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동은 이름 그대로 섬진강 하류, 강의 동쪽에 자리하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 광양 사람들과 이웃사촌으로 지내왔다. 넉넉한 품으로 남쪽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강, 그 끝자락에서 마중 나온 봄날과 만났다.
슬로시티 악양을 아시나요? ‘거긴 또 어디?’ 머릿속에 대한민국 지도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면…. 부부송, 평사리 황금 들판, 최참판 댁이 있다. 또 임금께 진상하던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야생 차밭은 흔해 빠졌다. 지리산 줄기가 뻗어 있는 마을의 명물은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들판이다. 사월의 청보리밭과 시월의 황금 들녘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들판에 서 있는 사이좋아 보이는 소나무 두 그루를 부부송이라 부른다. 둘레에는 ‘토지길’이 나 있는데 하염없이 걷는 이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최참판 댁의 모델이었다는 초부잣집을 둘러보며 미로처럼 놓인 상신마을의 돌담길을 걷는 맛도 좋다.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뽑힌 취간림과 항일독립투사 기념비도 있다지만 마을의 백미는 회남(回南)재다. 청학동이 있는 청암면을 잇는 고갯길로 조선시대 조식 선생은 악양이 길지라는 소리를 듣고 찾아와 고개를 넘다가 길지가 아니라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고 한다. 지금은 트레커들 사이에서 지리산의 숨은 가을 명소로 알려져 있다. 다들 지리산 단풍과 평사리의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가을이 최고라 하건만 우리는 봄의 회남재를 최고라 떠들고 다닌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굴이 있다. 그것도 섬진강에서 수확되는 민물굴이다. 벚꽃 필 때만 먹을 수 있어 그런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강 속에서 먹이를 먹으려고 입을 벌린 모습이 벚꽃이 핀 것 같아서라고. 섬진강 물줄기가 남해와 만나는 하구 3~4미터의 깊은 물에서 서식하는 석굴은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니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12월부터 4월까지 채취되는데 산란을 앞둔 3월과 4월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벚굴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도 여럿 있다고 들었지만 우리는 십리벚꽃길에 취해 좀 더 낭만적인 방법으로 맛보기로 하였다. 마침 십리벚꽃길의 도로변에 이름도 없이 벚굴을 파는 노점이 있어 값을 흥정하고 간이 테이블을 풀밭 위에 펼쳐놓고 벚굴을 맛보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자란 굴은 바다의 굴보다 짠맛이 적고 보드라웠다. 벚굴 위에 벚꽃 잎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져 살포시 앉는다.
아~ 술 없이도 취할 수 있구나. 봄은 그렇다. 하동의 봄은 취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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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 악양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35, www.slowcityhadong.or.kr
글=책 만드는 여행가 조경자(//blog.naver.com/travelfoodie), 사진=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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