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역에서 전철을 타고 10여 분을 가면 후시미(伏見)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육상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교토와 오사카를 잇는 뱃길로 번성하다가 지금은 술 빚는 마을로 나이를 먹어간다. 사람 사는 향기 폴폴 풍기는 시장과 주택가에 표연히 보이는 술도가. 물이 좋아 술맛이 기가 막힌 후시미에서는 명주 찾기 놀이를 즐기기 좋다.
술의 마을, 또는 물의 마을로 불리는 후시미는 옛 지명을 후시미즈(伏水)라 표기했을 정도로 좋은 물이 나는 동네로 지금도 ‘후시미 7대 명수’가 샘솟는다. 기자쿠라 기념관 내에는 후시미즈가 샘솟으며 이 물로 만든 일본주와 맥주가 생산된다. 도리세이혼텐 옆에도 샘이 하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시간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아 물을 받아 간다.
고코노미야진자라는 신사에서도 후시미를 대표하는 물이 난다. 862년 신사 경내에 향기가 좋은 물이 샘솟자 고코노미야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그 후 미모로진자는 고코노미야진자로, 이름 없던 샘물은 고코스이(御香水)라 불리게 됐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후시미 사람들은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영험한 물로 여겨왔다고 한다. 혼덴 동쪽의 대나무 통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고코스이는 일본의 명수 100선으로도 선정됐다.
무로마치시대(1336~1573년)부터 술을 빚어왔다는 후시미에는 현재 스물여섯 곳의 양조장이 있다. 그중 후시미의 술도가 하면 다들 겟케이칸(月桂冠)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1989년에 미국에 진출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사케나 재팬 사케라는 보통명사 대신 일본 술의 대명사를 겟케이칸으로 바꾸어버린 일화는 동네 사람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월계관으로 알려진 후시미의 자랑거리인 술 회사는 1637년 창업한 이래 일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옆 동네인 고베 나다의 하쿠츠루 슈조(白鶴酒造)와 일본 술 판매량 1위 자리를 놓고 혈투를 벌이는 겟케이칸에서는 아직도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100퍼센트 핸드 메이드 술이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겟케이칸의 전속 술 장인들은 4월부터 10월까지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벼 수확이 끝날 무렵 양조장으로 와 겨우내 술을 만들다가 벚꽃이 필 때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겟케이칸이 자랑하는 다이긴조와 긴조의 고급 술 일부는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비록 생산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겟케이칸은 핸드메이드 술맛도 계속 잇고 싶다고 했다.
대형 술 회사이면서 까다로운 수제 술도 고집하는 겟케이칸. 그 술맛의 비밀을 알아내려면 연간 11만 명이 찾는다는 오쿠라기넨칸(大倉記念館)으로 가야 한다. 옛 술 창고를 개조하여 일본 술의 역사와 제조법 등을 소개하고, 교토 시로부터 유형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6000여 점의 주조용 도구 중 4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술 박물관이다.
후시미 최고의 포토 스폿은 마츠모토 주조(松本酒造). 1791년 창업한 술도가는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술 창고와 붉은 벽돌로 쌓은 연통이 인상적이다. 봄이 되면 술 창고 앞 공터에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매우 이국적인데, 몇 편의 시대극이 촬영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 앞에 서면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테니 지칠 만큼 사진을 촬영한 후에는 가까운 술 가게에 들러 마츠모토 주조의 술을 구경해야 한다. 부담 없는 값에 충실한 맛을 지닌 마츠모토 주조의 술은 후시미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대표 브랜드는 히 노데자카리(日出盛)와 모모노 시즈쿠(桃の滴). 특히 나마자케란 효모가 살아 있는 술맛이 빼어나다.
야마모토혼케(山本本家)는 후시미의 7대 명수 중 하나로 꼽히는 하쿠기쿠스이(白菊井)라는 샘물이 솟는 자리에서 1677년 창업한 오래된 술 회사다. 대표 브랜드는 신세(神聖). 오래된 술 창고를 개조하여 문을 연 술집 도리세이혼텐은 신세를 비롯한 야마모토혼케의 다양한 술을 잔술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1925년 창업한 술도가 기자쿠라에서 문을 연 기자쿠라 갓파 칸츄리(キザクラカッパカントリ-)는 갓파 자료관(資料館)과 레스토랑, 술 바 등이 자리한다. 갓파는 기자쿠라의 술병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물속에 산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후시미의 술도가는 술 제조와 판매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술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장되어 있는 듯하다. 겟케이칸은 술 박물관을, 야마모토혼케는 선술집을, 기자쿠라는 갓파 칸츄리를 오픈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일본주만 고집하지 않고 변화하는 고객들의 입맛에 맞추어 맥주나 매실 와인 등 다양한 술도 속속 선보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기자쿠라 갓파 칸츄리에서도 자랑할 만한 맥주가 있다. 교토대학, 와세다대학과 공동으로 개발한 나일 시리즈. 원재료의 일부를 고대 이집트가 원산지인 밀을 사용한 화이트 나일 외에 블루 나일, 루비 나일의 세 종류가 있어 입맛대로 골라 마실 수 있다.
구레타케안(くれたけ庵)을 뭐라 소개해야 좋을까? 1층은 100%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밥집 겸 술집이고, 2층은 방 세 개짜리 여관이니 말이다. 술마을에서 나고 자란 주인은 친구들 몇 명과 역시 친구인 술도가 사장에게 청하여 술도가의 술탱크 하나를 빌려 술을 담아 필요할 때마다 빈 대병을 들고 가 술을 담아와 마시는 자타공인 애주가다. 옛집에는 번듯한 다실이 있었고 동네 찻집에 부탁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게 블렌딩한 맞춤차를 마신다. 서예와 그림을 즐기며 재즈 뮤지션을 초대하여 라이브도 여는 생활 문화인이다. 그런 주인장이 건네는 술과 안주에는 품격이란 게 묻어난다.
마을에서 빚은 술 중에서 입맛에 맞는 명주 몇 가지를 골라 손님에게 권한다. 구레타케안이란 가게 이름을 단 술은 단골들에게만 맛을 보여주는 비밀스러운 술이다. 주인이 직접 담근다는 매실주나 산복숭아주 따위의 담금주 맛도 훌륭하다. 가짓수는 적지만 위스키, 맥주, 와인도 마련하여 구색을 갖췄다. 그런데 술집 주인이 반한 한
국술은 경주 최부자집에서 빚는 명주라고 한다.
안주는 술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깐깐하게 굴지 말고 주인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 여관 손님에게만 특별히 아침밥을 차려주는데 가정용 도정기로 그때그때 도정한 쌀을 흙냄비에 담아 밥을 짓고 직접 담근 낫토로 반찬을 만들고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국을 낸다. 산골마을에서 정직하게 농사를 지어 담근 채소절임 명인의 채소 반찬도 맛볼 수 있다. 또 보들보들한 달걀말이도 뜨끈할 때 상에 낸다. 아침이 이러하니 애주가 주인이 건네는 술안주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술집의 정식 이름은 슈슈코코야(酒?好肴也)이나 단골손님도 그냥 구레타케안으로 부른다. 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작은 술집은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여관 손님에게만 입장을 허락한다.
*소곤소곤 Tip
술마을에는 온통 술에 관한 것들로 차고 넘친다. ‘교카시츠카사 도미에이도(京菓子司 富英堂)’라는 화과자점에서는 술을 넣어 만든 찐빵을 고안했고 히트를 쳤다. ‘사케 만주’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후시만의 특징을 지닌 자랑할 만한 명물 과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4대 점주는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역 술이 존재하듯 지역 사람들이 찾는 명물 과자를 선보이고 싶어 술지게미를 넣은 술빵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Infomation
고코노미야진자 京都市 伏見 御香宮門前町 174, 075-611-0559
겟케이칸 오쿠라기넨칸 京都市 伏見 南浜町 247, 075-623-2056, 09:30~16:30, 8월 15일 전후, 연말연시 휴관, 입장료 300엔
기자쿠라 갓파 칸츄리 京都市 伏見 屋町 223, 075-611-9919, 10:00~20:00(갓파 자료관)
도리세이 혼텐 京都市 伏見 上油掛町 186, 075-622-5533, 11:30~22:30, 월요일 휴무(12월과 공휴일은 영업
구레타케안 京都市 伏見? 南新地 4-21, 075-601-3789, 19:00~22:00(예약제)
*교토 역에서 JR 나라(奈良) 센 모모야마(桃山) 역, 교토 역에서 긴테츠 교토(近?京都) 센 모모야마 고료마에(桃山御陵前) 역, 게이한(京阪) 산조(三條) 역에서 게이한혼(京阪本線) 센 후시미 모모야마(伏見桃山) 역 또는 주쇼지마(中書島) 역.
글·사진=책 만드는 여행가 조경자(//blog.naver.com/travelfo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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