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28주기①]글로벌 시대, 호암 사업철학 재주목…'능력과 한계 냉철히 판단'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본 기사 사진제공 : 호암재단)

[아시아경제 손선희 기자]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해야 한다.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피하는 한편 제2,3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1937년 첫 사업 실패를 겪은 뒤 얻은 교훈이다. 이는 훗날 현재의 삼성그룹의 토대를 닦기까지 그의 사업 철학이 됐다. 아울러 80여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시대에 대규모 사업재편 등으로 변화를 겪고 있는 삼성그룹에 여전히 시사점을 던진다.◆호암 이병철, 쓰라린 첫 실패로 '사업 철학' 얻어=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 선대회장은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스무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닥친 세계 대공황과 극심한 경제혼란을 목격한 뒤 유학생활을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 사업에 뛰어들었다.이 선대회장의 첫 사업은 정미소였다. 1936년 봄, 고향 근처인 마산에서 지인 두 명과 함께 공동출자로 '협동정미소'를 시작했다. 이어 정미소에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당시 매물로 나왔던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해 운송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 두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이 선대회장은 토지매입에 관심을 갖고 은행 대출을 통해 토지투자 사업을 펼쳤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인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토지 시세가 폭락했다. 대출에 의지하던 토지투자사업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결국 이 선대회장은 시가보다 싸게 모든 땅을 팔고 정미소와 운수회사까지 처분하고 나서야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이 첫 사업실패를 통해 이 선대회장은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호암재단에 따르면 이는 훗날 현재의 삼성그룹 토대를 닦기까지 그의 사업 철학이 됐다.

이 선대회장이 1938년 대구에서 설립한 '삼성상회'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삼성그룹 모태 '삼성상회' 탄생=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상호는 이 선대회장이 직접 지은 것이다. 그는 "삼성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라며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빛나는 것을 뜻한다"며 이같이 지었다. 첫 사업실패를 겪은 뒤 재출발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소원을 담은 것이다.이 선대회장은 1938년 3월 대구에서 직접 지은 상호를 붙인 '삼성상회'를 자본금 3만원에 설립, 중국과 만주를 대상으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자본과 기술, 인프라 등이 특없이 부족해 물자생산업만으로는 사업 확장이 어려웠다. 이에 이 선대회장이어 국수제조업, 조선양조 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해 급성장한 삼성상회가 곧 오늘날 삼성그룹의 싹이 된 셈이다.

1951년 설립된 '삼성물산 주식회사'

◆'삼성물산' 시작으로 삼성그룹 본격 확장…반도체는 '신의 한 수'=이 선대회장은 국제무역 사업을 진행하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축적해 둔 자본금으로 1951년 '삼성물산'을 설립했다. 이후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 1964 한국비료 등 계열사를 세우며 본격적인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무역업부터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으로 영역을 넓힌 것이다.그러다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이 선대회장은 설립 2년 만에 한국비료의 소유주식 전부(전체의 51%)를 정부에 헌납하고 사업을 포기했다. 추후 1994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삼성그룹에 '삼성정밀화학'이란 이름으로 재편입됐지만, 최근 롯데와 매각 계약을 맺으면서 영원히 삼성을 떠나게 됐다.이어 이 선대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설립하면서 전자와 중화학 분야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이 선대회장이 73세의 나이에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힌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당시 마이크론과 샤프 등 해외 기업의 기술을 도입하며 오래 준비한 끝에 1984년 5월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공장의 준공식이 열었다. 국내에선 최초, 국제적으로는 세 번째 반도체 생산국이 된 것이다. 이 선대회장의 "일렉트로닉스 혁명에서 뒤쳐지면 영원히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신념이 오늘날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었다.

호암 미술관에서의 호암 이병철

◆55세 생일 맞아 가족에 '삼성문화재단 설립' 뜻 알려=이 선대회장은 사업가였으나 '물질에 인간의 행복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에 그는 기존 사업과 별도로 '사회에 직접 공헌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그가 55세 되던 해 생일, 가족에게 먼저 '삼성문화재단' 설립의 뜻을 밝혔다. 10억 원 상당의 주식과 33만여 제곱미터(약 10만평)의 부동산을 기금으로 출연하고, 이후 당시 갖고있던 재산의 3분의 1을 재단기금으로 추가 출연했다. 평소 예술을 사랑했던 이 선대회장은 개인 소장품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전시하는 방법으로 미술관을 세웠고 이것이 현재의 '호암미술관'이 됐다. 외에도 생명공익재단, 복지재단, 호암재단 등을 통해 지금까지 각종 공익사업을 전개하고 있다.이 선대회장은 1987년 1월 한 언론사 기고문에서 "나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며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의 사명도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 국민 그리고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남겼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난 그해 11월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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