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형 국민대 경영학 교수
추석이 다가오면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명절을 앞두면 마음이 들뜨는데 시장에 가면 더욱 좋았다. 잘 익은 사과, 배뿐만 아니라 온갖 농축수산물이 풍성하게 진열돼 있는 시장을 걷노라면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의 전통시장은 대형할인점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990년 후반에 들어오기 시작한 대형 할인점은 규모, 가격경쟁력, 그리고 주차 설비를 포함한 편의성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경쟁우위로 시장과 골목 슈퍼의 고객을 앗아갔다. 소비자들은 전통시장의 쇠락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았으며, 아주 쉽게 외면했다. 정치권에서 전통시장 살리기를 외치고, 정부에서 '온누리 상품권'을 발행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표를 의식한 제스처'로 보았고, 전통시장의 소멸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우리는 전통시장을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시절, 내가 가장 즐겨 찾았던 장소는 시장이었다. 인근 지역 농장주들이 직접 자신이 가꾼 농축산물을 가져와서 파는 '파머스 마켓'은 포틀랜드의 명물이다. 신선한 농축산물을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거리 예술가들이 펼치는 공연을 즐길 수 있으며 지역 최고의 요리사가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핫도그, 부리토, 크레이프 등을 맛볼 수 있다. 파머스마켓은 농부의 자부심, 가족 소풍, 관광객의 즐거움, 거리예술가의 공연, 요리사의 경연 등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스페인, 영국,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전통시장은 우리와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오랜 전통시장은 낡고 더러워졌고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문을 닫는 점포가 속출하고 떠나가는 상인도 생겼다. 하지만 전통시장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지방자치단체와 상인들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도시의 보석으로 재탄생한 전통시장들도 꽤 많다. 영국 런던의 버로우시장은 로마시대에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버로우시장은 1997년 리모델링을 하면서 전통과 자긍심을 살리면서 현대화도 이뤄내 최고의 명소로 거듭났다. 올드스피탈필즈시장, 코벤트가든 등의 시장도 자신들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현대화작업을 추진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특히 코벤트가든은 거리예술가들의 즉석공연 등 쇼핑과 예술을 접목해 연간 3000만명의 고객을 불러 모은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미구엘시장, 산안톤시장,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시장, 산타카트리나시장 등도 지자체의 지원과 상인들의 노력으로 성공적인 현대화 작업을 이룬 곳이다. 우리나라에도 명소로 거듭나는 시장이 있다. 서울 통인시장은 기름떡볶이, 효자김밥, 엽전으로 반찬을 골라 사는 도시락 등의 명물을 만들어내 주말 기준 3만여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게다가 한옥과 골목길 등을 보존하고 있는 서촌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취를 느끼게 한다. 인근의 대형 할인마트와 당당하게 경쟁하는 역곡상상시장(옛 북부시장)도 지역 주민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건승하고 있다. 전주 남부시장은 '청춘시장'이라 불릴 정도로 젊은 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아직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게 현실이다. 전통시장 활성화는 시작단계인 셈이다. 지금 소상공인전통시장진흥공단이 활발하게 전통시장 활성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준비된 만큼 이제 중요한 것은 시장 상인들의 노력이다. 성공한 전통시장의 핵심 성공요인은 바로 사람이다. 신망받고 헌신적인 리더(상인회장)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시장의 발전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협동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보존하면서 현대화하려고 했고 또 지역 주민과의 교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려고 적극 노력했다.보존과 현대화를 조화롭게 실행한 전통시장은 도시 재생의 주역이 될 것이며 나아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명소가 될 것이다. 전통시장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이은형 국민대 경영학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