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경제번영 이뤄내…'죽으면 집 헐라'고 유언하기도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
[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영국 식민통치시대인 1923년 9월16일 싱가포르의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타격 받은 뒤 평범한 중산층으로 주저앉았다.학구열이 높았던 리는 당시 싱가포르 최고 대학 래플스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2차대전이 끝나자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문화 신봉자였던 그는 유학 중 인종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런던정경대학(LSE)에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 법학과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950년 6월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이후 싱가포르로 돌아와 1959년까지 노동자들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했다.그는 노조원, 중국계 학생,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가들까지 규합해 1954년 11월 인민행동당(PAP)을 출범시켰다. 이어 PAP 초대 사무총장 자격으로 탄종파가르 지역에서 출마해 의원에 당선됐다.리는 1959년 6월 35세로 자치정부 초대 총리가 된 뒤 1965년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90년 11월 사임할 때까지 탁월한 리더십으로 싱가포르를 안정적·개방적이고 경쟁력 있는 선진국가로 만들었다.리의 통치 기간 중 싱가포르는 최고의 경제번영을 일궈냈다. 그는 다소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으로 가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했다. 하지만 특유의 결단력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행정의 효율성을 꾀했다.그의 제1목표는 싱가포르의 생존을 확보하고 인종 간 관용으로 국민의 동질성도 확보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는 중국·인도네시아 같은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중요한 것은 리가 싱가포르의 주권독립에 경제발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에 싱가포르를 산업화해 세계 굴지의 완제품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계획이 수립됐다.이후 외국 자본이 유치되고 노조와 경영인의 합의로 산업평화가 찾아와 생활수준은 향상됐다. 리는 복지 개선을 도모하면서 협력·규율·검약의 필요성도 역설했다.독립 당시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1990년 1만2750달러에 이르렀다.지난해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국가청렴도는 세계 5위다.하지만 다른 나라들처럼 과거 싱가포르 역시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리는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설립했다. CPIB는 부패 용의자와 그 가족에 대한 체포·수색, 증인 소환, 계좌 및 소득 추적 같은 권한을 갖고 있다.리는 깨끗하고 정직한 정부를 유지하려면 고위 공직자의 소득이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4년 장관, 판사, 고위 공직자의 연봉을 사기업 전문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맞추자고 제안했다.리는 1940년대 구입한 자택에서 줄곧 살아왔다. 집은 1950년대 PAP 창당을 논의했던 장소로 아들인 리셴룽(李顯龍) 현 총리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싱가포르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저택이다.그러나 리는 2011년 자기가 죽으면 집을 헐라고 가족에게 말해놓았다고 밝혔다. 집을 박물관 같은 유적으로 관리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 데다 이웃들이 자기 집 탓에 재개발하지 못해 재산상 손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2차대전 이후의 세계 지도자 가운데 리 전 총리처럼 30년 넘게 국정을 이끌고 국민들로부터 국부(國父)로 절대적 신뢰도 받으면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한 인물은 별로 없다.이진수 기자 commu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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