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태동기 - 체제정비기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는 곧 한국 근대 경제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중은행이 설립된 지는 이미 100년이 넘어 광복 전부터 우리 민족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을 거친 뒤 턱없이 자본이 부족했던 국내 산업이 성장하는 데 주요 자금공급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은행을 빼놓고는 우리나라의 경제사를 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이다. 이후에도 은행은 정부 주도로 국가 경제 정책이 시행되는 최일선에 있기도 했고, 주요 경제 주체들이 자립하는 데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전쟁 후 빈곤의 터널을 지나 '먹고살 만해지기'까지 은행은 늘 국민의 곁에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1997년 말 폭발한 외환 및 금융위기와 심각했던 기업, 가계경제의 굴곡사에서도 은행을 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현재의 은행 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는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 ◆근대 은행의 출현과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금융기관은 1876년 개설된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으로 기록돼 있다. 외국 자본이 금융의 기초를 흔들었던 것이 우리나라 은행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도 역사적인 상황들과 맞물려 계속됐던 외국은행의 지점 설립은 경제침략에 맞서 민족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조선은행, 한성은행, 대한은행이 민족자본에 의해 잇따라 설립됐다. 하지만 이 은행들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영업부진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한천일은행 설립 청원서 및 인가서
1890년대 설립된 민족은행들 중 제 역할을 한 곳은 1899년 세워진 대한천일은행이다. 대한천일은행의 명맥은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연결되는데, 지난해 말 퇴임한 이순우 전 우리은행 행장이 이용한 차량 번호가 '1899'였던 것도 민영화를 앞두고 대한천일은행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이 은행은 창립정관 청원서에 조선인만 주식을 매매할 수 있다는 제한 규정을 두는 등 일본의 은행에 맞서 민족자본을 육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히 대한천일은행은 서울의 유력 상인들이 주축이 돼 설립을 주도하고 당시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져 일반은행과 중앙은행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대출 등의 업무는 물론 당시 화폐인 백동화의 통화량 조절, 황실 및 주요기관의 재정업무 등도 담당한 것이다. 고종의 윤허를 받아 황실의 내탕금을 자본금으로 지원받았고 민병석 농상공부 대신이 초대 행장을 맡는 등 정부 관료를 경영진으로 영입했던 점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899년 5월에는 금융기관 최초지점인 인천지점이 개설됐고 이어 본점 건물이 1909년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현재는 우리은행의 종로지점으로 사용되고 있어 민족은행을 설립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대한천일은행의 두 번째 행장은 영친왕이었는데 이광구 현 우리은행장이 올해 새출발을 다짐하기 위해 영친왕의 묘소인 홍유릉을 참배하는 등 그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우리나라 은행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외형상으로는 근대적인 금융제도의 모습을 갖췄으나 내용면에서는 일제 식민지 금융제도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천일은행의 통장
◆해방 뒤 이어진 '뱅크런'=1945년 해방은 은행사에서 보면 피할 수 없는 금융혼란의 시기를 가져왔다. 우선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일시에 대규모 예금 인출이 이뤄졌다. 패망한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고 물가는 급등하면서 한국인들도 덩달아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해방과 동시에 '뱅크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미 군정과 과도정부는 당시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을 접수하고 일본인 예금을 동결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1945년 12월이 돼서야 이뤄진 조치였다. 결국 금융기관의 예금인출 사태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의 긴급대출이 확대됐고 이는 통화남발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으로 보면 금융기관의 유동성 위기를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이 같은 은행의 혼란은 당시 기업들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은행들은 예금인출로 굴릴 돈이 없어지자 신규 대출을 중지하기 시작했고 기업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또 일본계 기업의 철수와 도산 등으로 부실채권이 크게 늘면서 은행들도 파산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1948년 수립된 정부는 이런 경제적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각종 금융기관 관련 법령의 대대적인 정비가 시작됐다. 1950년 4월 '중앙은행 개편에 관한 건의서', '일반 금융기관 개편에 관한 건의서' 등이 제출됐고 이는 그해 5월 공포된 한국은행법의 초안이 됐다. 이에 근거해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창립됐으며 우리나라 금융제도의 본격적인 정비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상업은행은 한국상업은행으로, 조선신탁은행은 한국신탁은행으로 개칭됐으며 조선저축은행은 한국저축은행으로, 조선상호은행은 한국상공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은행들은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됐다. 중요 증서와 장부 등은 직원들이 나눠 가지고 피난을 떠났지만 많은 자산이 건물 파괴와 북한의 은행 점령 등으로 사라진 것이다. 휴전 후 분단으로 인한 점포 상실은 은행 경영을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당시 북한지역에 있었던 한국상업은행의 점포만 27곳에 달했다. 전쟁은 은행들에도 막대한 피해를 안김 셈이다. 지하자원과 주요 공업시설이 북한에 편중돼 있었던 것도 남한의 경제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전쟁을 거친 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은 1953년 통화개혁이었다. 설인 2월14일 밤 자정을 넘어서자 15일자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긴급통화조치'가 발표된 것이다. 내용은 기존의 통화를 100대 1로 교환하는 평가절하였다. 이는 해방과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경제상황을 극복하고 물가안정을 이루기 위한 조치였고, 전후 경제회복의 기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지만 당시 충격을 받은 국민들은 수레에 구 화폐를 싣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또 다시 '뱅크런'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은 부산의 한 여관에서 보안을 유지하면서 6개월 동안의 작업 끝에 통화개혁안을 준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0년대 은행 직원의 전산교육 장면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은행들=은행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은행법이 시행된 뒤다. 이 법은 한국상업은행ㆍ조흥은행ㆍ상공은행ㆍ저축은행ㆍ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합병과 민영화 등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이 합병해 한일은행의 전신인 한국흥업은행이 됐고 한국저축은행은 제일은행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 서울은행이 설립되면서 한국상업은행, 한일은행, 조흥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 등 5개 시중은행 체제가 확립됐다. 특히 상업은행은 미국, 일본, 유럽 등에 직원을 파견해 선진국 금융 시스템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은행 업무의 기계화가 대표적인 성과다. 은행사박물관 관계자는 "현대화된 금융시스템과 고객 대기시간 단축 등을 위해서는 은행 업무의 기계화가 필요했다"며 "당시 금융선진국에서 위폐감식기, 지폐계산기, 텔레타이프 등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초기에 사용하던 은행의 수표발행기
고객 중심 경영도 등장했는데 상업은행의 '숙녀금고'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은행으로 만들어졌으며 1964년 해외 유력 금융지인 아메리칸 뱅커에 소개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정책금융 기관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1954년 산업자금 공급을 위해 한국산업은행이 설립됐고 1956년 농업금융을 전담하는 농업은행이 세워졌다. 이후 1962년 수립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은행들은 산업금융체제로 재편돼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상업은행이 선보인 숙녀금고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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