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강정호의 ML 진출과 한국 야구의 발전

메이저리그 진추을 추진 중인 넥센 히어로즈 강정호[사진=김현민 기자]

입단 계약이라는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지만 21세기 한국 야구의 수준을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강정호가 만들었다. 프로야구 넥센은 지난 20일 "메이저리그 구단이 포스팅을 거쳐 강정호를 영입하겠다고 제시한 최고 응찰액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2일 오전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강정호를 영입하겠다며 내놓은 돈은 500만2천15달러(약 55억 원)다. 이 응찰액은 1998년 포스팅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야수 가운데는 스즈키 이치로(1천312만5천 달러 외야수)와 니시오카 츠요시(532만9천 달러 내야수)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서 한국과 맞붙은 일본의 주전 3루수로 국내 팬들에게 낯이 익은 나카무라 노리히코는 최고 응찰액을 제시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이례적으로 금액을 공개하지 않았다. 나카무라가 다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은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응찰액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무라 아키노리(내야수)는 450만 달러, 아오키 노리치카(외야수)는 250만 달러였다. 2000년 이치로부터 2011년 아오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일본인 야수들이 강정호보다 낮은 입찰액을 소속 구단에 안기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사실만 두고 보면 한국 야구는 투수인 류현진(2573만7377.33달러 입찰액 전체 4위)에 이어 야수도 일본 리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정호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입단 계약을 맺게 될지가 남아 있긴 하지만 니시오카(3년 900만 달러 미네소타 트윈스)와 이와무라(3년 770만 달러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사례를 보면 계약 기간과 관계없이 연봉은 300만 달러 안팎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준으로 계약이 이뤄지면 한국 리그는 포지션에 관계없이 일본 리그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평가돼 야구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앞서 ‘21세기’라고 시점을 특정한 까닭은 이 땅에 야구가 소개된 1904년 이래 100년이 넘는 긴 시간 속에 꾸준히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904년 야구 도입 연도와 관련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 국내 여러 자료에는 야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도가 1905년으로 적혀 있다. 그해 황성기독교청년회(오늘날의 서울YMCA)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소개했다는 게 그동안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야구 관계자들에 의해 1904년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제는 ‘1904년 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2009년 9월에 간행된 ‘서울YMCA 체육 운동 100년사’에는 야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5년이 아니라 1904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재우 박사는 “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해가 1905년이라고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은 일본인 오시마가 쓴 ‘조선야구사’를 인용하고 있다. 오시마는 한국의 야구 도입을 메이지 37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메이지 3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면 1904년이 된다. 메이지 3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1년 차이가 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손기정 선생 일장기 말살 사건의 주인공)이 쓴 ‘조선 스포츠사-특히 한말 전후를 기록한다’에도 야구는 YMCA가 창립된 다음 해인 1904년에 들어온 것으로 돼 있다. YMCA 연구자인 전택부는 "야구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04년께다. 미국 예일대학교 출신이며 만능 운동선수인 질레트가 1901년 내한했을 때 YMCA에는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경신중학교에서 일시 귀국한 한민제 등 일본 유학생들과 야구를 한 것이 한국 야구의 효시"라고 밝혔다.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독일어학교가 훈련원(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2008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대한제국 군인들이 훈련하던 역사적인 장소)에서 야구 경기를 치러 독일어학교가 3점 차로 이겨 한국 야구사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당시 스코어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국야구사’와 ‘대한체육회 90년사’는 첫 야구 경기를 근대 스포츠 도입기에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로 평가하고 있다. 2019년에 역사적인 제 100회 대회를 여는 전국체육대회의 출발점이 1920년 조선체육회 주최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였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야구 팬이면 알고 있다. 그해 7월 13일 창립된 조선체육회가 이미 국내에 소개돼 있었던 육상과 축구, 농구, 배구, 사격, 검도, 유도, 스피드스케이팅, 연식정구, 복싱, 조정 등 많은 종목 가운데 야구 대회를 가장 먼저 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조선체육회 창립을 이끈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야구인들이었던 데다 1915년 아사히신문 주최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 경기 규칙과 대회 운영 요강 그리고 기록부 등을 조선체육회가 갖고 있었기에 이 자료들을 참고삼아 대회를 무난히 치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1963년 제 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서울) 우승, 1977년 슈퍼월드컵(니카라과) 우승,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인천) 우승,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WBC) 클래식 3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 등은 야구 발전 과정에서 한국이 받은 빛나는 훈장들이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스포츠레저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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