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발전의 뿌리, 산업단지 50년을 돌아보다 <2>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 '한국인들이 오고 있다!(The Koreans Are Coming!)' 1977년 6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이같은 제목으로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조명했다. 표지에는 태극기를 든 한국인들의 무리가 라디오와 옷, 신발을 내세워 세계를 누비고 있는 모습이 묘사됐다. 커버스토리는 한국인을 두고 "일본인을 게으른 민족으로 보고 있는 유일한 이들"이라며 "지도자가 목적의식을 심어주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소개했다. 그보다 22년 전인 1955년,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의 인도 대표 메논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과는 180도 다른 시선이다. 외국의 시선이 변화한 이유는 70년대부터 시작된 눈부신 산업 성장 때문이다. 1960년대 경공업으로 산업화를 시작한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을 산업화의 성장 엔진으로 삼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는 바"라며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시작했다. 노동집약적인 경공업만으로 고도성장을 이어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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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시대, 산업단지는 바다를 끼고 태어났다. 중화학공업을 하려면 대규모의 공장 입지, 공장 가동을 위한 용수, 원료와 제품 운송을 위한 항만과 도로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담당부처인 건설부는 산업기지개발공사(현 수자원공사)를 설립해 진해와 여천, 온산, 창원 등에 임해산업단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해군기지가 있는 진해에는 조선소, 여천에는 석유ㆍ비료화학, 온산에는 동ㆍ납ㆍ아연 등의 금속, 구미는 전자기기 등 철저한 분업화가 이뤄졌다.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에 연평균 20.9%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1979년에 이르러서는 중화학 공업화율이 51.2%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 1970년에 12.8%였던 것이 1980년에는 41.5%에 도달했다. 1973년 오일쇼크로 주요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했음에도 우리나라는 1974년 8.7%, 1975년에는 8.3%, 1976년에는 15.2%의 성장을 거쳐 1977년도에는 1980년대 초로 목표 삼았던 100억 달러 수출을 조기 달성했다.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 기사가 나온 것도 이 때였다. 외신들은 한국의 고속 경제발전을 두고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으며, 싱가포르ㆍ홍콩ㆍ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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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현대 등 지금까지도 우리 경제를 이끄는 세계 일류 기업들이 성장한 것도 이 때였다. 현대차는 1968년에 첫 차인 '코티나'를 생산한 후 1974년에 고유모델 '포니' 생산에 성공했으며, 1977년에 그리스에 포니 300대를 수출하면서 유럽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또 한 쪽에서는 현대중공업이 1983년 일본을 제치고 조선업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아무 기반도 없는 가운데 1970년대 초반 조선업에 뛰어든 우리나라가 20년이 채 못 되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선 것이다. 삼성전자는 1975년 '이코노 TV'를 대히트시키면서 흑백TV 부문에서 세계 1위로 뛰어올랐다. 기업들의 성장 뒤에는 울산ㆍ구미의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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