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 첫 내부승진 女임원…박경순 징수상임이사
박경순 건보공단 상임이사
[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새침한 여고생은 말이 없었다. 남학생들이 말을 붙이면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남학생들은 이 여학생을 "참 못 됐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여학생은 이른 아침 소 풀을 뜯어놓고 등교하는 부지런한 딸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3남5녀 중 맏딸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로부터 38년. 새침했던 여고생은 남성일색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첫 내부승진 여성 임원이 됐다. 박경순 건보공단 상임이사는 자그마한 체구에 온화한 인상을 가졌다. 그의 얼굴에선 남성 직원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고위직에 오르는 과정의 피로감인 이른바 '세월의 모진 풍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박 이사는 자신의 삶을 '완전 연소'시키는 사람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꿨고, 이로 인해 누구 보다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여자'라서 설움 받던 시절 = "1976년 1월20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박 이사는 38년 전 처음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날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9급 공무원에 합격해 첫 발령지는 경북 구미의 한 면사무소. 공무원 동기 20명 가운데 여자는 달랑 둘 이었다. 여자 동기 한명은 군청으로, 박 이사는 면사무소로 보내졌다. 박 이사는 "면사무소로 발령난 세 명 중 저혼자 여자였다"면서 "처음 저를 보자 면장님은 군청으로 전화해 '이렇게 바쁜 시기에 여자를 보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셨다"고 회고했다. '여자'라는 편견을 없애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들은 농번기에 농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릴 적부터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박 이사는 실력을 인정받았다. 박 이사는 "어릴 때부터 해왔던 풀 뽑기 등 농사일은 두렵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현장에 적응했다"고 귀뜸했다.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큰 자산이었지요.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나 힘든 일을 만나도 두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고 덧붙였다. 주변에서 '간 크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새마을 운동과 '잘 살아 보자'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시절,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열심히 일한 주인공이 성공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박 이사는 "드라마 주인공과 저를 동일시하면서 같은 꿈을 꿨다"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계속 꿈을 꾼 것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배 고프던 어린 시절에는 배 불리 먹는 것이 꿈이었고, 직장에선 인정받고 싶었다. 그는 "어느정도 (직장내)위치가 안정되니 더 나은 지위를 꿈꾸는 등 꿈이 끝이 없다"며 "항상 꿈을 이루고 나면 한 단계 위의 꿈을 꾼다"고 웃어보였다. ◆비온 뒤 땅이 더욱 굳는다 = 박 이사는 인생의 전환점을 건보공단이 1차 통합된 1998년으로 꼽는다. 당시 건보공단 내부는 지역과 직장, 공무원 등 각각의 의료보험조합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구조조정 불안감이 팽배했다. 구조조정은 부부사원이나 여직원에 타켓이 집중됐다. 박 이사는 "명퇴를 하면 퇴직금으로 억대를 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면서 "매일 아침 출근하면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명퇴 이야기를 나눴는데 여직원들의 주로 타겟이었다"면서 "앞으로는 명퇴금도 주지 않고 구조조정 한다는 소문에 많은 직원이 사표를 썼다"고 설명했다. 박 이사가 위기감을 느낀 것은 여자 선배의 퇴사였다. 여직원계 대모격인 선배의 퇴사는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퇴사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박 이사는 "다른 지역 직원들은 학력이 빵빵하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계속 근무하기 위해서는 역량을 키우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졸업한 박 이사는 건보공단이 통합되던 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건보공단이 2차 통합할 때까지 부산지역본부에서 유일하게 석사학위를 가진 직원으로 꼽혔다. ◆유지필성(有志必成) = 박 이사가 직장생활과 대학생활을 병행할 무렵에는 여직원의 한계가 분명한 시기였다. 야간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부서장에게 추천서를 요청하자 당시 부장은 "여자가 차장까지 달았으면 됐지, 뭐하려고 대학에 가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박 이사는 동료차장이 내민 '유지필성(有志必成,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진다)'이라는 붓글씨를 보고 용기를 얻어 고교 졸업 후 20년 만에 다시 학구열을 불태웠다. 주부가 직장생활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1인 3역'은 고단했다. 하지만 만학의 기쁨은 쏠쏠했다고 박 이사는 전했다. 그는 직장인 마산에서 대학이 있는 부산까지 2시간 버스를 타고 오갔다. 그는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버스를 타는 동안이 유일하게 한가한 시간"이라며 "홀로 책도 읽고, 잠도 자고, 생각도 할 수 있어 참 좋았다"고 말했다. 야간대학 동기들과 어울리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었다. 야간대학인 만큼 주로 직장인이 많았고, 박 이사는 최고령 신입생인 58세의 새마을금고 이사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다. 그는 "어린 학생들이 우리를 '달리는 경로당'이라고 불렀다"면서 "제가 '정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서 학생들이 제 노트를 자주 빌려갔는데 한번은 빌려가 사람이 노트를 잃어버려 시험을 보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다. 젊은 시절로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만 제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또래 문화를 느끼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박 이사가 있을까. 박 이사는 "글쎄…"라면 답을 아꼈다. ◆엄마는 워커홀릭 =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한 박 이사도 작아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족 앞에서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시어머니께 월요일에 맡기고 주말에 찾아왔다. 아이가 조금 더 큰 뒤에는 교사인 남편이 주로 아이를 돌봤다. 박 이사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운동회 등 학교에서 자주 엄마를 불렀지만 그 때마다 남편이 대신 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아플 때는 특공대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시어머니가 아이의 병원을 데려가면 일찍 끝나는 남편이 병원에서 아이를 찾아온다. 박 이사는 "저는 민원인을 상대하느라 움직일 수 없는 만큼 애들 아버지가 아픈아이들을 챙겼다"고 미안해했다. 박 이사는 38간 직장생활이 "인생의 전부"라고 꼽았다. 건보공단에서 만난 동료ㆍ선후배와 부대끼며 먹고 살고, 가족을 부양하고 살았다다. 그만큰 일에 대한 애착도 컸다. 그는 "남은 일을 두고는 퇴근을 못한다"면서 "낮에는 민원인을 보느라 공문볼 시간이 없어 저녁에 주로 공문을 보고 정리했다"고 말했다. 어린 딸은 "엄마 회사 그만두고 매일 놀아줄까"라고 물으면 "친구들이 직장 다니는 엄마를 부러워한다"며 이해해줬다. 하지만 최근에는 딸이 "엄마는 결혼해선 안되는 사람"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박 이사는 워커홀릭이다. 박 이사는 "7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인내하고 말없이 자리를 지켜준 남편과 아이들이 언제나 고맙다"고 말했다. ◆마지막 소임은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 건보공단 여직원 가운데 가장 먼저 유리천장을 깬 박 이사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그는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문제를 꼽았다. 현재 건강보험 가입자간 제각각 적용되는 건강보험료를 공평하게 손보자는 취지다. 박 이사는 현재 보험료를 징수하고, 자격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있다. 최근 건보공단과 보건복지부, 학계 등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부과체계 개선안이 공개됐지만 복지부는 '속도 조절론'을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박 이사는 "잘못된 건보료 부과쳬계로 연간 5730만건의 민원이 발생한다"면서 스스로를 '부과체계를 개선하는 원군'이라고 지칭했다. 부과체계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논리도 잘 개발해 복지부를 설득할 계획이다. 퇴임 후 계획은 '세상 구경'이다. 박 이사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TV가 아닌 직접 경험하고 싶다. 여행 다니면서 대화할 수 있도록 영어공부도 할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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