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모던보이, 새벽上京, 노숙자, 쇼핑…歷史의 驛舍

일제 시대 구 서울역사 완공..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무대가 되기도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이 있다. 자고로 큰 사람이 되려면 문물의 집결지이자 기회의 땅인 수도 '서울'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청운의 꿈을 가진 수많은 청년들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 위치한 서울역은 이들이 첫걸음을 내딛는 곳으로, 익숙한 과거와 작별하는 종착역이자 불투명한 미래로 향하는 출발역이었다. 최근 케이블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도 대학 생활을 위해 지방에서 막 올라온 '삼천포(김성균)'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울역을 둘러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의 만남과 이별의 배경이 됐던 곳 역시 서울역이다. 하루 유동인구 40만명, 이용객 10만명을 자랑하는 '서울의 관문' 서울역은 한 세기가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서울역이 첫 등장한 시점은 1900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노량진까지만 이어지던 철도가 한성에까지 들어오게 되자 '남대문정거장'이라는 이름으로 역이 처음 만들어졌다. 역이라고 할 것도 없이 염천교 아래 논 한중간에 열평 남짓한 2층짜리 목조건물이 다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서울 노량진-인천 제물포를 오가며 운행하던 열차를 보고 이같이 표현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다."하지만 일제치하의 격변기를 보내면서 서울역은 그 이름과 외관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남대문역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경성역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5년에는 서울역사가 준공됐다. 설립사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다. 일본은 경성역이 일본부터 만주까지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지만 한편에서는 조선 내에서 군사적 목적과 식량을 포함한 물자의 약탈을 신속하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진 역사 건물은 큰 화제가 됐다. 붉은 벽돌과 지붕의 돔, 독특한 외관의 중앙홀 등은 좀처럼 보기 힘든 설계였다. 1930~1940년대 서울역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공간으로, 숱한 모던걸ㆍ모던보이들이 이곳을 무대로 삼아 노닐었다. 경성역 2층에 개업한 양식당은 조선총독부내 고관들이나 실업가, 상인, 고급군인들을 주로 상대했으며, 프랑스 스타일로 명성이 자자했다. 천재시인 이상이 소설 '날개'에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치던 곳도 바로 이곳, 서울역이 주무대였다.
이후 광복이 되면서 경성역은 지금의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을 했다. 전국으로 뻗은 수많은 선로들은 1960~1970년대에는 조국의 근대화ㆍ산업화의 대동맥 역할을 했다. 수많은 농촌 총각ㆍ처녀들이 '서울로, 서울로'를 외치며 고향을 떠났다.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으려는 귀성객들로 서울역은 아우성을 이뤘다. 끝내 1960년 1월에는 서울역에 수많은 인파가 티켓을 구하기 위해 몰렸다가 압사사고로 31명이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석탄을 연료로 쓰던 증기기관차는 중유나 경유를 쓰는 디젤기관차로 세대교체를 하게 되면서,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가 철로 위를 종횡무진 달렸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고속철도 시대가 개막하면서 서울역은 또 한 번 변화를 맞게 됐다. 2004년 KTX 개통과 더불어 서울역에 민자 역사인 신역사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서울역은 역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숱한 애환을 옆에서 지켜봐온 구 서울역사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84호로 지정됐지만, 한동안은 그 쓰임새를 찾지 못한 채 내팽겨져 있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서 소유권 이전 등의 절차를 거쳐 이곳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지난해 4월 공식 출범한 '문화역서울 284'는 다양한 전시, 공연 등을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현재는 '근대성의 재발견'이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관계자에 따르면 "하루 평균 300~500명, 주말에는 800명 이상이 관람하며, 주로 서울역을 방문한 승객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구 역사가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올해로 완공된 지 10년을 맞은 고속철도 서울역은 수도권 지하철 1, 4호선과 경의선, KTX가 서는 곳으로 바쁜 도시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난 한 세기동안 서울역이 단순한 정거장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역 광장때문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그 곳은 독립 운동가들의 주요 무대였고, 근대화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구 서울역 바로 앞에는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 있는데, 동상이 위치한 그 곳이 바로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2일 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장소다. 2011년 9월2일 폭탄투척 92주년을 기념해 동상이 세워졌다.  근현대사의 역사적인 순간마다 사람들은 서울역 광장으로 몰렸다. 1945년 8월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이 하나둘 모여든 곳도, 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찾은 곳도 서울역 광장이었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에는 서울시내 35개 대학의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집회를 열었고, 1987년 6월에는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지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곳에 차려진 시민빈소에서 눈물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진정한 '광장'이 됐던 서울역 역시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는 없다. 서울역과 맞은편 대기업들의 화려한 고층빌딩을 잇는 지하광장에서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신문지와 골판지로 바람을 가리며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있다. 때마침 지상의 광장에서는 코레일 노동자들이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철도민영화 철회, 철도 외자 개방 반대' 피켓이 차가운 광장을 달구고 있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사진=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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