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그때가 북아현동에 살적인데, 옆에 댁인가 앞에 댁인가 인호보다 한 살 더 먹은 남자애가 살았어. 그런데 이쁘게 입혀 가지구 이화대학 부속유치원에 다니는데 부러울 수밖에. 그래 인호도 유치원 가게 될 나이가 되니까. 내가 유치원 원서를 얻어다 놨다. 했더니 우리 시아버님이 "유치원 보낼래?" 하시면서 걱정이 나시는 거여. 가뜩이나 일제강점에 유치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그래서 못 보냈지 뭐. 얼마나 그때 속으로 짠하드라구. 어느 영이라고 어겨. 억지로 어떻게 보낼 수 없지?""그 교통수단이 저거 할 때니까 메신저 역할도 했다고 방물장사가. 비밀통로도 되고. 내 어려서 들은 얘기가 생각이 나요. 어떤 집이 남자가 외도를 해가지고 아이를 낳았는데, (애기를) 데려 와버렸어. 그런데 그 주인아주머니가 사람이 마음씨가 착해. 그래가지고 애가 아프거나 그러면 방물장사를 시켜서 친엄마에게 기별을 해가지고 와서 애기 보고 가라고.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니지. 그런 거를 내가 어려서 학교 다닐 적에 숙명여학교 다닐 적에 귀로 듣고 보고 살았어."한 사람의 인생에는 당시의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시대상이 녹아있다. 따라서 개인의 생애를 기록하는 작업인 '구술생애사'는 사회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이해되며, '많은 개인들의 짧은 인생이 모여 큰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증명한다. 1914년 태생으로 지난해 100세를 맞이한 한 여성의 구술생애사가 담긴 보고서가 나와 눈길을 끈다.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태어난 이석희 여사의 100년 생애는 출생에서 노년까지 한 여성의 일생이면서도, 한국사에서는 격동의 시간이었으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문화적 대변혁기였다. 조선 명문가에서 귀하게 자란 무남독녀였던 이 여사는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자, 향촌(鄕村)의 반가(班家, 양반의 집안)로 시집간 반가의 며느리였다. 또 여섯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노년에는 쉰 명에 가까운 손자와 증손자를 두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구술연구팀은 지난해 2월3일부터 11월 15일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이석희 여사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매주 또는 격주로 한번 씩 그의 집을 방문하고 약 2시간씩 이야기를 나눴다. 구술자가 고령인 상황을 배려했던 차원에서 채록이 진행됐다. 이석희 여사의 생애사 연구를 제안한 이는 강신표 인제대학교 명예교수이며, 100세 노모를 설득한 이는 국내 첫 여성 대사로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이인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지난해 봄 이석희 여사는 백수연(百壽宴, 100세 생일잔치)을, 이인호 교수는 희수연(喜壽宴, 77세 생일잔치)을 가졌다. '20세기 어머니-이석희의 삶과 근대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보고서에는 당시 전통적 신분제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자녀 교육에 대한 자세는 어떻게 이어지며 새로운 현대 교육제도에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나아가 여성들의 생활사는 어떻게 변했는지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중 1946년 친정 어머니가 이 여사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백미다. 막내아들 성호를 임신한 채 세 살 먹은 둘째 딸 자호를 데리고 친정 어머니 생신에 잠시 다녀온 후에 받은 것이다. “회충약도 먹지 않게 조심시키고, 먼데 다니지 말고, 뭐든 이고 다니지 말라.”고 구구절절 딸을 염려하는 모정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더불어 책에는 이 여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통해 조선말 우국충정이 강했던 양반관료들이 식민지시기를 어떻게 겪어 냈는지, 그들이 물밀듯 밀려든 근대의 바람을 어떻게 마주했는지 등 근대사의 이면도 담겨있다. 보고서는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www.nfm.go.kr) 발간자료 원문검색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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