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플라스틱 카네이션

벽과 천장 사이, 누런 시간의 얼룩이 느린 벌레처럼 구불구불 지나간 자리에 녹슨 대못이 구부러진 채로 하나 박혀 있었다. 거기, 조화(造花) 세 송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 있었다. 녹색의 플라스틱 잎 위에, 억센 붉은 천을 돌려서 카네이션 흉내를 낸 꽃.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를 이 꽃에 대해, 어찌된 일인지 한 번도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외갓집 거기에 원래 놓여 있어야 하는 물건처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이제야 문득 의문을 지녀본다. 외삼촌이 전쟁에 나가 뼈 한 줌과 전사통지서로 돌아온 이후로 자손이라곤 끊어진 적막한 집에, 그 카네이션은 대체 누가 준 것이었을까. 저 세 송이는 외갓집의 단출한 식구 숫자와 같았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숙모. 이 세 사람을 위해 사온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삼 년에 걸쳐서 누군가가 계속 보냈던 기특한 마음이었을까. 이걸 대답해줄 분은 이제 외숙모밖에 없으시다. 그는 그 사연을 기억하고 계실까. 그걸 거기다 꽂아 놓았던 사람은 아마도 외할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는 아마도 팔자에 없는 카네이션을 받고 무척이나 가슴이 설빀을 것이다. 자식 박복하여 늘그막에 보람도 없다 싶었던 삶이었는데, 문득 이 고마운 선물로 죽은 자식이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해 5월 내내 그 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시들지 않는 저 꽃처럼, 모처럼의 살뜰한 관심이 시들지 않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외할머니는, 더럭 겁이 났을까. 내년엔 저 아이가 선물을 보내는 걸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꽃을 보관해두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두 해쯤 더 꽃이 이어졌지만, 그 뒤로는 정말 소식이 없었다. 카네이션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카네이션이 없는 해마다, 남 몰래 천장에서 꽃을 꺼내 가슴에 달고 동네를 다니지 않았을까. 먼지 낀 꽃은 1년에 한 번씩 그렇게 외할머니의 가슴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거기 올라가 피어 있던 게 아니던가. 꽃을 꽂으며, 그는 섭섭함을 키운 게 아니라, 그를 떠난 '인연'이 어디서 잘 살고나 있는지 걱정하며 그리워했으리라. 외할머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어버이날, 나의 플라스틱 카네이션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문득 여기저기 미안해지면서 마음이 울컥해진다.글=향상(香象)<ⓒ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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