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이번에도 술이었다. '소폭 회오리'-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적당량 섞은 뒤 손목의 스냅으로 한 차례 격하게 뒤흔든(처음에는 힘들어도 요령이 생기면 맥주잔에 환상적인 작은 거품 회오리가 일어나기에 강호 고수들은 이 주법을 일러 소폭 회오리라 했던 것인데…), 맥주와 소주를 초월한 신세계의 풍미와 열정을 선사하는-를 열 잔 이상 마신 탓일까. 내면 깊이 잠복해 있던 작은 분노가 포말이 되어 아랫배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회오리 형상으로 소용돌이치다 결국 목구멍을 거쳐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까짓것, 그만두면 될 거 아냐." 뭐, 여기까지는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직면하는 아주 흔한 일이지만, 그러니까 거기서 끝났으면 다음 날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 출근했을 텐데, 한발 더 나가는 바람에 스텝이 꼬이고 말았으니. 내친 김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냅다 집어던진 것이다. 핸드폰이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아스팔트 바닥을 한참 뒹굴더니 다가오는 버스의 앞바퀴 밑에서 납작하게 절명하고 말았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어지고 나서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되는 건 이 시대의 경우 물도 공기도 아닌 핸드폰이었다. 완벽한 단절. 물건 하나 없어졌다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나. 회사에 나가지 않았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다. 집에도 유선전화는 있으니 누군가 말을 걸어오겠지, 싶어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혹 집으로 찾아올까, 며칠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직장과의 인연은 그걸로 단절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가까스로 새 직장을 얻어 다니고 있을 때 우연히 길에서 예전 상사를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어, 아직 서울에 있었네, 근데 왜 전화를 안 받은 거야? 회사에선 한동안 당신이 외국으로 이민 갔다는 말이 돌았는데…." 이 땅의 젊은 샐러리맨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인사팀에 제출하는 신상명세서에는 반드시 집 유선전화 번호 또는 주소를 남겨야 한다는 것. 글=치우(恥愚)<ⓒ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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