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15세기 말부터 100여년간은 전국시대가 펼쳐진 시기다. 이 시기 일본 각 지방의 영주들이 자웅을 겨루었지만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천하가 통일된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들 중 특히 일본인들이 애착을 보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다케다 신겐이다. '카이노쿠니'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다케다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마군단을 활용해 일본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는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는 전술적 지침하에 기동전을 벌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풍림화산은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조용하게, 불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는 의미다. 1572년 다케다 신겐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도쿠가와의 본거지인 하마마쓰를 위협하면서 주변의 성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함락시켜 갔다. 오다와 도쿠가와 동맹군에게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다케다 군단은 대승리 직전에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회군해 버렸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의문투성이의 회군이었다. 다케다 군단의 급작스러운 회군 이유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다케다 신겐의 죽음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의 군단이 긴급히 영지로 철수한 것이다. 3년 동안 다케다의 죽음이 비밀에 부쳐진 것은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주변의 라이벌 영주들이 공격해 올 걸 우려해 3년 동안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유언한 것이다. 그의 극적인 유언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유명한 영화 '카게무샤(그림자 무사)'에서도 묘사된 바 있다. 그가 병사한 후 가신들은 그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을 가짜 영주로 옹립해 영토를 유지했으나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발각돼 성 밖으로 쫓겨난다. 영화에서 카게무샤가 쫓겨난 후 다케다 가문은 몰락한다. 만일 다케다가 53세의 나이에 병사하지 않았더라면, 오다 노부나가의 야심도, 도쿠가와의 천하통일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한 인물의 죽음이 역사를 뒤바꾼 극적인 사례다. 한 인물의 죽음이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다. 2007년 아이팟을 시작으로 2008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혁신제품의 출시는 전 세계의 정보기술(IT) 판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잡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질풍처럼 들이닥친 잡스의 신제품에 맞서 삼성전자는 총력전을 벌였다. 이미 초기 스마트폰 '옴니아'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본 터라 삼성전자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이런 치열한 경쟁의 와중인 2011년 10월6일, 다케다보다 3살 많은 56세의 나이로 스티브 잡스는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애플 제국의 공격적 혁신이 정지했음을 의미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4월6일 귀국한 김포공항에서 "신경영 20년이 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물과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말했다고 한다. 이전에도 이 회장은 '삼성전자가 배부른 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끊임없는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조원의 매출과 30조원의 영업이익 앞에 어떤 직원이 위기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도, 기업도 생로병사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소니도, 노키아도 그리고 마침내 애플도 어느 순간 혁신의 시계바늘은 멈추었고,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일 어떤 기업이 이런 조직의 숙명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혁신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진정 '위대한 기업'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한 요체는 위기감이 아닌 혁신의 구조화이다. 운 좋게 스티브 잡스라는 '위대한 적장'이 사라진 지금, 삼성전자는 과연 '배부른 돼지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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