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오랫동안 해바라기 하던 어머니도 믿었던 연인도 곧 모두 준영에게 돌아 설 텐데 인주 씨가 딱합니다.
악역이 가는 길은 끝이 없는 가시밭입니다. 어떻게든 주인공을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 애를 써보지만 과욕이 화를 부르고 결국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 몰락하고 말아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원하는 걸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점이 아닐까요? 인주 씨가 고준영(성유리)이 흘린 목걸이를 손에 쥔 채 “내꺼야, 절대 안 뺏겨”라고 다짐했지만 어쩌죠? 아리랑의 차기 명장 자리가 이미 물 건너 간 건 물론 벌써 오래전부터 남자 친구인 최재하(주상욱)의 마음은 준영을 향하고 있는 걸요. 또 인정받고자, 사랑 받고자 일평생 노력해온 부모님은 어쩌고요. 어릴 시절 어머니에게 혼나고 놀이터에서 혼자 있을 때 “인주야, 인주야”하고 부르며 찾아다니는 소리가 어찌나 따뜻하게 들리던지 한참을 더 숨어 있었다는 인주 씨가 아닙니까. 하인주 씨, 아니 실은 송연우지요? 운명의 단추가 악역 쪽으로 끼워진 건 순전히 성도희(전인화)의 남편 하영범(정동환)의 탓입니다. 인주 씨가 내내 아버지라고 불러온 그 사람 말이에요. 인주 씨에게서 송연우라는 이름을 앗아버린 게 바로 하영범(정동환)이잖아요. 남편의 불륜 사실에 충격을 받아 손목을 그어 자살 기도를 했던 성도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딸 인주까지 잃어버리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딸에게 걸어줬던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연우를 보고 딸로 착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하영범은 다섯 살짜리 어린 애에게 결코 해서는 아니 될 제안을 했죠. “이 목걸이 주은 거 아니야. 처음부터 네 꺼야. 이 방, 침대, 장난감 전부. 앞으로 네가 원하는 것 다 해줄 거야. 이제부터 너는 송연우가 아니라 하인주니까.” 그래서 송연우가 아닌 하인주로 살게 된 인주 씨는 거짓된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었죠. 커서는 아버지 방에서 여자 아이용 팔찌를 발견하고 무심히 껴봤다가 네 것이 아니니 당장 빼라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잖아요.<H3>연우 씨, 내 것이 아닌 이름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세요</H3>준영의 요리가 외국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인주 씨가 지은 착잡한 표정, 이제 얼마나 자주 보게 될지요.
그러나 인주 씨는 잊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일탈을 위해 들렀던 클럽에서 김도윤(이상우)에게 도움을 받던 날 똑똑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잖아요. “내 이름은 송연우, 꼭 기억해. 대한민국 서울에 송연우라는 스물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살고 있다. 송연우, 송연우.......” 스무 해가 넘도록 하인주로 불리어 온 인주 씨가 송연우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인주 씨, 남의 삶을 자신의 삶인 양 살아온 인주 씨는 도대체 언제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 걸까요? 노력 없이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듯 살아왔다면 또 모르지만 누구보다 실력을 갈고 닦아온 인주 씨라서 더 안쓰럽습니다. 얼마 전에도 준영이가 청국장으로 재탄생시킨 신개념 요리가 외국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이내 착잡한 표정을 지었죠. 이제 얼마나 많이, 자주 그 표정과 눈빛을 보게 될지 걱정스럽네요. 더 딱한 건 오래전 다섯 살 때 하영범에게 이용을 당했던 것처럼 또 다시 성도희의 숙적 백설희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어렵겠지만 하인주라는 허울을 하루라도 빨리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어쩌면 요리사의 길이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았으면 해요. 요리사의 길 역시 내 것이 아닌 허울일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