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나의 캐디편지] '제발 천천히 가세요~'

언젠가 다리가 불편하신 고객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절룩절룩 걸어오시며 "언니 안녕?"하며 반갑게 인사하시는 고객님은 환한 미소로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는 걱정이 먼저 앞섰습니다. "오늘 진행이 조금 느리겠구나"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죠. 근데 웬걸 첫 홀부터 무척 빠르게 뛰어다니시는 고객님입니다. 불편한 다리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제가 클럽을 가져다 드리기가 벅찰 정도였습니다. 한 홀 두 홀 지나는 사이 라운드 시작 전 기우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플레이 속도가 너무 빨라 앞 팀을 내내 기다리고, 제일 먼저 그린에 도착해 동반자들을 기다리는 고객님께 급기야 "고객님, 제발 천천히 좀 가세요"라고 빌다시피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고객님께서 그렇게 뛰어다니시는 이유가 있더라고요.처음 골프를 시작했을 때, 그것도 팀이 아주 많은 골프장에 새벽라운드를 자주 가셨는데 처음 갔던 날 캐디가 인사보다도 먼저 드린 말씀이 "고객님, 저희 첫 팀이니까 진행 빨리하셔야 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부터 라운드를 할 때마다 무조건 뛰어다니신다고 하시네요. 처음엔 몰라서 뛰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뛰어다니면 동반자와 캐디 눈치도 보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어 훨씬 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첫 홀에서 고객님을 보자마자 걱정부터 하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순간 "지금 내가 캐디가 아니였으면" 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고객님의 불편한 다리가 골프를 즐기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를 안다면 골프를 순수하게 즐기시는 분들께 편견을 갖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죠? 건강한 몸보다 건강한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스카이72 캐디 goldhanna@hanmail.net<ⓒ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골프팀 손은정 기자 ejso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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