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제일 잘 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아직은 저도 제가 잘하는 게 뭔지 찾고 있어요.” 정겨운은 7편의 드라마에서 주연이었고, 그가 출연했던 SBS <싸인>과 KBS <태양의 여자>,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모두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주무기가 개발 단계라고 느껴서일까? 정겨운은 최근 종영한 KBS <로맨스 타운>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너무 아쉬운 작품이에요.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많이 남고, 지금도 잘 안 잊어져요.”계급의 한계를 온몸으로 뚫고 나간 식모 순금(성유리)의 명확했던 캐릭터에 비해 어리숙한 속마음을 감추고 갈팡질팡하던 건우는 그에게 잘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정겨운의 가능성은 오히려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언뜻언뜻, 자주 보여주지 않았지만 상처 때문에 삐뚤어진 영혼을 가진 남자들의 얼굴을 보여주던 때처럼. 곁에 있는 유일한 친구마저 조롱하고, 자신의 목숨조차 게임의 카드로 써버리는 MBC <달콤한 인생>의 성구는 절대적인 분량과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정겨운이라는 배우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자신을 괴롭히는 재벌 3세는(<미워도 다시 한 번>) 잔뜩 심술 맞은 말들을 뱉어놓는 순간에도 여성 시청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그래서 정겨운이 좋아하는 배우들이 연기한 캐릭터가 심성 고운 착한 남자들이 아니라 살인마나 세계정복을 꿈꾸는 초능력자, 알고 보면 마음 여린 조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리는 그는 이미 무엇을 자신의 최종병기로 삼아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 제대로 완성된 칼로 꺼내놓을 때까지 정겨운은 시뻘건 쇠를 달구고 또 달구고 있을 것이다. “독한 악플을 약으로” 삼고, 연출자들이 “언제든 찾으면 달려갈 준비”를 하면서. <hr/>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2007년 | 에단 코엔, 조엘 코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뿐만 아니고 하비에르 바르뎀을 참 좋아해요. 그 사람이 뿜어내는 극한의 마초 이미지가 정말 멋있어요. 특히 연기할 때 자신의 매력을 자유자재로 표출하는데 정말 대단하죠. 배우로서 자신의 매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중요한데 하비에르 바르뎀은 정말 부러워요. 저도 그런 장기가 있었으면 좋겠고 아직은 제가 제일 잘 하고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고 있어요.”코엔 형제가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던가? <참을 수 없는 사랑>, <사랑해 파리>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에 힘이 빠졌다고 생각될 때쯤 그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완벽한 반전을 만들어냈다.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등 연기의 교과서 같은 배우들이 매순간 명장면을 만들어낸다.
2. <똥파리> (Breathless)2008년 | 양익준 “주인공이 아버지한테 정말 끝까지 막하잖아요. (웃음) 아버지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일관성 있게 막 대하는데도 그 남자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 인상 깊었어요. 저 남자가 저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현실과 주인공의 마음이 읽어지더라구요. 남들한테는 강한 척 하면서도 속은 여린 남자의 속마음 같은 게 드러나는 영화였어요. 저는 그런 영화를 좋아해요.” <똥파리>는 어퍼컷 같은 영화다. 말 대신 욕을, 악수 대신 발길질을 내미는 남자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을 훅 하고 치밀고 들어오는 그 강력한 한 방에 관객은 넉다운이 될 수밖에 없다. 배우이자 감독인 양익준의 강렬한 장편 데뷔작이다.
3. <열혈남아> (Cruel Winter Blues)2006년 | 이정범 “<열혈남아>도 참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다 남자영화네요. (웃음) 이 영화가 끝나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보면서는 조한선 씨가 하셨던 역할을 하고 싶었구요.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가 있었지 할 정도로 몇 번을 계속해서 봤던 영화예요. 설경구 선배님의 날연기라고 해야될까요, 그 분의 연기는 정말 최고봉인 것 같아요. 의도하진 않았는데 제가 고른 영화들이 다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네요.” <아저씨> 이전에 <열혈남아>가 있었다.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아저씨> 이정범 감독의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에서 자란 남자들의 외로움과 여린 속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4.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X-Men: First Class)2011년 | 매튜 본“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아, 저 역할 나도 하고 싶다, 잘 할 수 있겠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매그니토에 감탄하면서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그런데 또 악인이네요. (웃음) 최근에 본 영화중에 이 영화에 가장 감탄했어요. 보는 내내 “우와!”하면서. (웃음) 특수효과나 어떤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마이클 패스벤더 한 사람의 연기 때문에 더 놀랐죠.”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죽어가던 <엑스맨> 시리즈에 심폐소생술을 가했다. 스핀오프격인 <울버린>, 지난 시리즈인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 안겨준 실망감을 일거에 해소하고 시리즈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영화는 히어로물에 성장물의 청신함과 특유의 유머감각을 이식했다.
5.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2008년 | 크리스토퍼 놀런“<다크 나이트>하면 히스 레저죠. 그가 <다크 나이트> 때문에 힘들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됐는데 그 캐릭터에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영화 속의 조커를 보면 알 수 있죠. 영화도 너무 좋았지만 히스 레저는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배우예요. 저는 아직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역할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캐릭터를 한다면 진짜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것 같아요. 영화도 많이 보고 실제로도 많은 경험을 하려고 하구요.”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그저 그런 프랜차이즈 히어로물의 위기에 있던 <배트맨> 시리즈를 철학적인 담론을 생성하면서도 스펙터클까지 놓치지 않는 기품 있는 작품으로 격상시켰다.<hr/>
작년 겨울 SBS <닥터 챔프>부터 올해 <싸인>, <로맨스 타운>까지 쉬지 않고 드라마를 찍어온 정겨운이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여름을 너무 좋아해요. 바닷가로 놀러가서 수영하고. 몸을 제대로 만들어서 수염이랑 머리도 있는 대로 다 길러서 내추럴하게 놀러다니려구요. 바다가 있는 곳 어디로든요.”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라는 서른의 마지막 여름을 부디 뜨겁게 보낼 수 있기를.<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10 아시아 글. 이지혜 seven@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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