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의 친선경기에서 가가와 신지(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구자철(볼프스부르크)의 수비를 제치고 측면을 돌파하고 있다.[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한국은 지난 10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축구 한일전에서 0-3으로 졌다. 1974년 도쿄에서 벌어진 한일 정기전에서 1-4로 진 뒤로 37년 만에 3골 차로 패했다. 점수 차도 컸지만 경기 내용에서도 뒤져 팬들의 실망이 컸다. 그러나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언젠가는 이 정도 스코어로 한국이 이길 것이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도쿄)에서 5-1, 1976년 메르데카배대회(쿠알라룸푸르)에서 3-0, 1975년 한일 정기전(서울)에서 3-0, 1978년 메르데카배대회에서 4-0, 1979년 한일 정기전(서울)에서 4-1, 1982년 한일 정기전(서울)에서 3-0 등 여러 차례 3골 차 이상으로 일본을 눌렀다. 그래도 축구 팬들의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프로 축구 K리그 울산 현대 김호곤 감독이 지난 14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일화와 K리그 21라운드 전 취재기자들과 만나 1974년 한일 정기전에서 1-4로 크게 졌던 뒷얘기를 털어놨다고 한다. 김 감독이 말한 뒷얘기의 요지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북한을 피하려다가 예선에서 탈락했고 이어 열린 한일 정기전에 국가 대표팀 수비의 핵심인 자신과 공격을 책임진 차범근 전 수원 감독이 연고전에 참가하느라 빠지면서 1-4로 대패하는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이 말한 그때 상황을 자세히 알아본다. 1974년은 아시아 스포츠의 판도가 크게 흔들린 해다. 9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는 앞으로 아시아 스포츠의 판도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아시아경기연맹(AGF,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전신) 가맹 26개국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25개 나라가 참가해 대회 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출전했다.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나선 나라도 중국과 북한, 바레인, 이라크, 쿠웨이트, 라오스, 몽골 등 7개국이나 됐다. 첫 출전한 나라들이 사회주의 국가, 서아시아 국가 등으로 아시아 스포츠 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대회는 3천여 명의 선수단이 출전한 가운데 9월 1일부터 16일까지 펼쳐졌다. 한국은 15개 종목에 임원 54명, 선수 177명 등 23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다. 북한은 15개 종목에 선수단을 보냈다. 한국은 금메달 16개와 은메달 26개, 동메달 15개로 1위 일본(금 69, 은 49, 동 51)과 2위 이란(금 36, 은 29, 동 17), 3위 중국(금 33, 은 45, 동 28)에 이어 4위로 밀려났다. 이 대회에 앞서 한국은 2회 연속 종합 2위를 기록했다. 치열한 남북 체제 경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북한(금 15, 은 14, 동 17)을 누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김호곤 감독(사진=정재훈 기자)
그런데 축구에서 문제가 벌어졌다. 15개 나라가 출전한 가운데 한국은 쿠웨이트, 태국과 1차 조별 리그 A조에 들었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태국을 1-0으로 이겼다. 태국이 쿠웨이트에 2-3으로 져 한국과 쿠웨이트는 2차 조별 리그 진출을 확정한 가운데 조 1, 2위를 가리는 경기를 갖게 됐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B조에 속한 북한이 첫 경기에서 중공(중국)을 2-0으로 이겼으나 2차전에서 이라크에 0-1로 지는 바람에 조 2위가 될 것이 확실해졌다. 한국이 쿠웨이트를 이기면 조 1위가 돼 2차 조별 리그에서 북한과 같은 조에 드는 게 확실시 됐다. 실제로 북한은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인도를 4-1로 누르고 이라크에 이어 조 2위로 2차 조별 리그 B조로 갔다. 쿠웨이트와 경기가 있던 날 한국 선수단에는 북한과 경기를 피하기 위해 쿠웨이트에 지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쿠웨이트에 0-4로 크게 졌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은 쿠웨이트와 1972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 차례 만나 1-2로 진 적이 있었지만 그 뒤 2011년 현재 8승3무8패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0-4로 대패할 전력 차가 아니었던 셈. 한국 축구는 그 무렵 1971년 2월 남미 원정에서 페루에 0-4로 진 적이 있지만 아시아권 나라에는 단 한번도 4골 차로 진 일이 없었다.2차 조별 리그에서 북한과 마주치지 않은 한국은 A조 첫 경기에서 이라크와 1-1로 비기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이란에 0-2로 지면서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말레이시아를 이기면 3위 결정전에서 북한과 만나게 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 2-3으로 져 1무2패로 조 꼴찌가 돼 이 대회에서 한국과 북한의 경기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은 1차전에서 쿠웨이트를 2-0으로 꺾었으나 2차전에서 이스라엘에 0-2로 졌고 마지막 경기에서 버마(미얀마)와 2-2로 비겨 1승무1패, 조 2위가 돼 3위 결정전에 나섰고 말레이시아에 1-2로 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등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는 이때 이미 꽤 약해져 있었다. 한국은 이후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에서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했고 1980년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정해원의 활약에 힘입어 2-1로 이기는 등 2011년 현재 북한과 경기에서 6승7무1패로 앞서고 있다. 북한 축구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으니 쿠웨이트전 대패는 첨예했던 남북 체제 경쟁이 낳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9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맹활약한 일본에 1-4로 크게 졌다. 한국은 후반 20분 김재한의 헤딩 슛으로 영패를 모면했다. 김 감독이 말한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은 당시 축구계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그 무렵 축구와 농구는 두 학교 선수들이 국가 대표팀의 주축이었다. 정기전 성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두 학교는 정기전 무렵 열리는 국제 대회 때 어떻게든 학교 소속 선수를 국가 대표팀에서 빼냈다. 한일 정기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얼마나 의욕을 잃고 뛰었는지는 직전에 열린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일본의 성적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일본은 조별 리그 C조에서 필리핀을 4-0으로 눌렀으나 말레이시아와 1-1로 비기고 이스라엘에 0-3으로 져 1승1무1패로 2차 조별 리그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했다. 일본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동메달 이후 '탈 아시아'를 선언했으나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준결승에서 한국에 0-1로 지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인도에 0-1로 패해 4위를 하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고전하고 있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버마와 공동 우승했다. 이런 일본에 3골 차로 졌다. 한국 축구로서는 기억하기 싫은 1974년의 참사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실무 부회장 등 일부 임원을 물러나게 하고 국가 대표팀 코칭 스태프를 경질해 코치에 함흥철, 트레이너에 김정남을 선임하면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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