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누워서 자연을 노니는 법

따뜻한 햇살에 집에만 있기에는 아쉬운 봄이다.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제각각 나들이 계획을 세우고 자연과 호흡하기 위해 야외로 나서지만 예상치 못했던 궂은 날씨에 계획한 일정을 취소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바쁜 일상에 잠깐의 시간을 내 자연을 벗삼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다.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했을까? 잠깐의 여유도 누리기 힘든 바쁜 생활을 그냥 감내하기만 하기보다는 그림을 통해 일상을 벗어났다.동양의 산수화 감상법 중에는 '와유(臥遊)'라고 하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누워서 노닌다는 뜻이다.

곽희, 조춘도(早春圖). 1072. 곽희는 북송시대의 화가이자 회화이론가로 삼원법이라는 동양화 특유의 원근법을 만들었다. 삼원법이란 고원·평원·심원의 세가지 시점이 얽혀 감상자가 그림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임천고치'가 있다. 그에게 와서 '와유'는 사대부들의 개인적 욕구와 임금에 대한 충성이라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 됐다.

이 개념은 중국 육조 시대에 간행된 역사서인 '송서(宋書)'와 당나라 때 쓰여진 역사책인 '남사(南史)'에 나오는 위진남북조시대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종병의 이야기에서 나온다.후한말·위진남북조 시대는 수많은 전쟁과 권력투쟁으로 죽음이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르는 불안한 시기였다. 이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무상한 현실보다는 무한한 자연에서 삶의 위안을 찾았고 종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원 김홍도. 총석정. 1778. 명승지를 그림에 담아 몸이 가지는 못해도 정신은 그곳에서 노닐 수 있다.

종병은 원래 산을 유람하는 것을 좋아해 산에다 거처를 만들고 자연에 은거할 생각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이 그렇듯 그는 결국 병 때문에 번화한 성시로 돌아왔고 늙고 몸이 쇠약해져 직접 명산을 보기 힘든 것이 걱정돼 그림을 그려 방에 걸어놓고 '누워서 유람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시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자연 속을 거닐었던 것이다. '와유'라는 개념이 종병에게는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는 정신적 해방이었다면 성리학의 시조인 주자가 살았던 송나라 시대의 '와유'는 사회적인 욕구와 개인적인 욕구의 충돌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송대의 사대부들에게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간언해 자신의 도덕을 세상에 실천하고 태평성대를 만드는 것이 사회적 측면에서의 욕구였다고 한다면 시끄럽고 번잡한 세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면서 인격적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개인적인 욕구였다. 그러나 자기 한 몸 편하자고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들이 배워온 학문에 어긋나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고 자연에서 노닐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와유'였다.이런 '와유'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림도 갖추어야할 요건이 있다.

석도. 여산관폭도. 1690년대. 석도는 청나라 초기의 화가로 '고과화상화어록'이 대표저서이다. 폭포 아래 감상자는 여산을 한 눈에 담으면서 여산과 일체가 되어 가고 있다. 폭포와 산의 호연지기에 취해버릴 것 같은 그림이다. 원래 그림은 좀 더 길어 폭포 뿐만 아니라 구름속의 봉우리도 표현돼 있다. 석도는 일획으로 천지개벽까지 나타낼 수 있다고 해 화가를 자연을 완전히 체득한 존재로 보았다.

'와유'를 하기 위해서는 그림속 자연이 현실속의 자연만큼 사실감이 있어 감상자에게 직접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줘야 했다. 이와 함께 자연은 단순히 노니는 곳이 아니라 인격적인 완성을 이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림의 자연도 역시 현실만큼 무한한 소우주여야 했다. 이때문에 소우주로서의 자연을 그려내는 화가 역시 자연과 하나가 돼야 한다는 학설이 당(唐)대부터 나왔다. 화가는 자연의 껍데기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뜻, 즉 보편적인 도를 그려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자연을 체득해야 한다. 또한 창작과정은 천지를 창조하는 것과 같아진다. 이에 따라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의 진의을 실현하고 그것과 하나가 돼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게 된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자연을 노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이런 '와유'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조선 세종 때의 화가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도원을 거니는 꿈을 꾼 후 꿈속에서 거닌 세계를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그림을 통해서라도 꿈속에서 만났던 이상세계인 도원을 다시 경험해보고 싶은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림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 왼편의 현실세계에서 오른편의 이상세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 등 21명의 고사가 찬시를 썼다. 무릉도원이라는 이상향을 그림을 통해서라도 가고 싶은 욕구가 보인다.

안타깝게도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있어 감상하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안견뿐만 아니라 진경산수의 시조로 불리는 겸재 정선 역시 와유에 정통했다.국보 제217호인 '금강전도'를 보면 금강산을 발로 밟아보려면 두루 걸어야 하기 때문에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이 낫다는 제시(題詩)가 있다. 이를 보면 겸재의 창작자로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호기와 감상자들에게 '와유'를 권유하는 의미가 둘 다 들어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겸재 정선. 금강전도. 1734.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시작한 겸재의 걸작이다. 당시에 중국 산수화를 따라 그린 그림이 많았지만 겸재는 직접 금강산을 보고 그렸다. 그림 속의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호쾌하다. 그림의 독특한 구성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왕 역시 세상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조선시대의 정조는 단원 김홍도에게 금강산을 그려오라고 해 단원은 사군첩이라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우리에겐 씨름 등 서민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한 단원이지만 산수화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내놨다.갑갑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이라면 '와유'를 생각하며 그림을 보면서 또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떨까.김준형 기자 raintree@asiae.co.kr<ⓒ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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