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아빠들은 슈퍼맨이 될 수 없다. ‘착한 아빠 코스프레’도 금방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때는 바야흐로 폭염이 절정으로 치닫던 8월 첫 주의 어느 날. 장소는 강원도 속초의 유명 워터파크. 더위를 즐기는 인산인해의 물놀이 현장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아이들을 앞세운 아빠들이었다. 평소의 실점을 만회하려는 과욕 때문이리라. 모두 '착한 아빠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평소 가족봉사에 인색했던 아빠들의 '어느 여름날의 하루'에 대한 관찰인 것이다(경험담이 전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 하루의 시작은 창대했다. 젊은 아빠, 배 나온 아빠, 머리 벗겨진 아빠들의 의욕은 흘러넘쳤다. "그래, 오늘 하루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리라." 아이들 주문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물론이요 튜브에 바람 넣는 것도, 미끄럼틀의 긴 줄을 서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아이들이 떼를 써도 하하, 소리를 질러도 히히 놀아주다보니 스스로 힐링도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깨지고 터지고 찢어진 상처들이 사르르 아무는 것이다. 게다가 언니 오빠들의 빵빵한 몸매를 힐끔거리는 보너스까지.
어느새 아이들보다 아빠들이 더 즐겁다. 그래, 기분이다. 점심은 아빠가 쏜다! 동네 치킨집보다 가격이 비싸면 어떠랴. 음료수 리필이 안 돼도 상관없다. 아르바이트생의 불친절도 너그러이 용서하리. 오늘은 축제의 날이다. 오늘만큼 이 아빠는 슈퍼맨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슈퍼맨은 너무도 빨리 지쳐갔다. 아이들과 노는 것이 크립토나이트다. 엄습한 피로에 말수는 급격히 줄고 눈 밑의 다크서클은 금방이라도 발 등을 찍을 판이다. 이제 겨우 하루의 절반을 넘겼건만 팔, 다리, 어깨는 어서 빨리 집에 가자며 징징거린다. 지친 몸 누일 곳을 찾아 기웃거리는데 이미 몇이 벌써 자리를 잡았다. 그늘에서, 텐트에서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심란하다.
오전의 위풍당당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집에 언제 가나, 가족 눈치만 살핀다. 아이들과 노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런 것이 과연 휴가란 말인가. 차라리 회사 일이 쉽겠다는 해괴망측한 생각이 들 때쯤에야 마눌님은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대한민국 아빠들은 아이들과 노는 법을 잘 모른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익숙지 않다. 최근 설문조사에서도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아빠들은 '아이와 노는 방법을 몰라서(29.7%)' '아이와 소통이 되지 않아서(20.7%)'라고 답했다. 게다가 체력도 바닥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 일에 치이다 보면 주말에는 건조대 빨래가 친구 하잔다. 부정(父情)과 모정(母情)의 깊이가 어찌 다르겠느냐마는 슈퍼맨은 언감생심이다. '일이 가장 쉬웠어요.' 대한민국 아빠들의 '웃픈' 현실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