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충훈 기자]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을 선포한 날이야. 동시에 내 생일이기도 하지. 내 이름은 '박스'(라고 쓰고 뇌물이라고 읽지). 내 안에 돈 있다. ㅋ
금융실명제 이후 나를 찾는 윗분들이 부쩍 늘었다고 하지. 10만원짜리 수표는 계좌추적이 가능하게 됐으니 말야. 현금 1만원짜리를 꽉꽉 채워 넣으면 좀 무겁긴 했지만 '더더 윗분'들에게 줄 선물로 그만이었지.
사실 예전엔 상자보단 '007가방'이 대세였어. 10만원짜리 수표로 꽉꽉 채워서 야심한 시각 룸살롱에서 주고받는 그런… 느와르 영화같은… 그림되지? 캬아~
1993년 당시 국민당 박철언 전 의원이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덕일 형제에게 5억원치 수표, 현금이 든 007가방을 받은 사례가 대표적이야. 당시 공판 법정에 선 정덕일이 직접 10만원짜리 수표 3억원치, 1000만원권 수표 1억9000만원치, 현금 1000만원을 담아 와 '007가방에 5억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지.
소소하게 천만 단위는 케이크 상자나 양주상자 같은 게 많이 쓰였어. 1994년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은 경성그룹 뒤를 봐주며 케이크상자로 4000만원을 받았었지.
비자금 하면 또 우리 전 대통령들 유명하잖아. 1996년에는 서울 중구 쌍용양회 경리창고에서 1만원권 현금 사과상자 25개가 발견됐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61억원이 그 안에 들어있었지. 정말 명.불.허.전.
세상에 없는 걸 만드는 자가 장땡이라는 '제로투원'의 법칙은 뇌물계에도 적용되나봐.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굴러다니던 무명의 사과상자를 일약 유명스타로 만들어준 분이 계시지.
바로 정태수 한보그룹 전회장이야. 아 그립다. 응답하라 1997년이여. 정 회장이 당시 은행과 정계 고위층에게 사과상자를 갖다 주며 했다는 말. "특별한 사과이니 잘 드세요".
사과상자는 가로 51cm*세로 36cm*높이 27cm. 1만원 지폐로 2억원 정도 들어간다네. 정 회장이 5000만원 이하는 007가방에, 5000만~1억 원 사이의 금액은 골프가방에 넣어 로비자금을 전달했다고 하니 참 꼼꼼한 분이셨어.
2년 뒤인 1999년에는 골프백이 트렌드였다고 하네. 당시 매체보도를 참고하자면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로 임창열 전 경기지사와 부인 주혜란씨가 구속됐는데 골프백으로 3억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었지. (근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주혜란씨가 007가방으로 신권 현금 1억 원을, 그리고 스포츠 가방 두 개에 담긴 3억 원을 받았다네.) 2001년 진승현 불법대출 게이트 때도 트렁크백, 골프백이 동원됐다고 하는군.
2002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기억나? 대선자금용으로 기업들이 갖다 바친 150억원치 사과상자 40여개. 이쯤 되면 뭐 사과상자는 뇌물계의 아이콘이 된거임. ㅇㅇ
2003년에는 짭조름한 굴비 대신 돈을 넣은 굴비상자가 '발명'됐지. 사과상자의 아성에 도전한거야. 양윤재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추진본부장이 부동산개발업체 길모씨에게 "고도제한 풀어달라"는 청탁과 함께 굴비상자에 든 1억원을 받았지.
2005년에는 뇌물상자의 다변화가 태동했다고 볼 수 있겠네. 한국마사회 비리가 불거졌을 때 윤영호 전 마사회장과 후임 박창정 전회장이 안동간고등어(3000만원), 상주곶감(2000만원), 초밥통(300만원)을 받았어.
2006년 5.31 지방선거 공천 헌금으로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이 구설수에 올랐지. 당시 박 전의원의 말 "집사람이 미화 21만 달러 들어가 있는 케이크 상자 선물 받았는데 집에 와서 보니 돈이 들어있었다". 근데 돈을 그 정도로 꽉 채우면 3kg가 넘는다지?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긴 한데 말야.
2009년은 뇌물의 슬림화가 시작된 기념비적인 해야. 바로 5만원이 출시됐기 때문이지. 이건 뭐 '딱'입니다. 유후~!! 덕분에 비타500, 박카스 같은 드링크제 박스가 인기 급상승. 비타500 10개입이 상자에는 여기에 5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8000만원 정도 들어간당. 정치인들 사무소 냉장고에 가득하다는 바로 그..비타~아 500.
첨단 방식의 신종 뇌물도 등장하기 시작했지. 박홍석 모뉴엘 대표가 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임직원에게 대출 좀 많이 해달라고 로비하며 쓴 뇌물상자는 거의 '혁신'급이야. 담뱃갑, 비눗갑에 무기명 50만원짜리 기프트카드 10장을 넣어 줬지. 역시 뇌물'갑'이구먼. 또 티슈곽, 와인 상자에 5만원권을 꽉꽉 담아주기도 했다네.
그럼 이렇게 보내온 상자는 어떻게 됐을까? 최근 이슈가 된 어록이 있지. 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이 이완구 총리에게 건넨 비타500 상자(3000만원)가 회계 처리 됐냐는 기자 질문에 한 대답이 정답이겠네. "뭘 처리해요. 꿀꺽 먹었지".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