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금감원의 카드는
기사입력 2018.08.02 08:56최종수정 2018.08.03 16:24 금융부 유인호 기자
[아시아경제 유인호 기자]
조선 인조때 학자인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 역사와 함께 여러 속담과 격언을 적었다. 그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알려진 격언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중학생 정도면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격언이다. 사후약방문은 사람이 죽은 후에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미리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금감원은 과거 자신들이 감리한 즉시연금 보험 상품이 약관 문제로 이슈가 되자 뒤늦게 구제를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즉시연금 사태가 불거진 시점 부터 사후약방문식 대처를 하고 있다. 한 소비자가 생보사를 대상으로 '즉시연금 최저보증이율 만큼 지급하지 않았다'며 분쟁조정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자 그때서야 관련 상품 약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후 금감원이 보인 행태는 언론에 알려진 그대로다. 갑자기 민원이 제기한 범위에서 벗어나 상품 약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며 보험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해결사를 자처한 셈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금감원은 즉시연금 일괄구제 카드를 꺼내들며 '소비자 보호'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현 정부 금융정책의 최대 모토인 소비자 보호는 금융 약자 보호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하지만 즉시연금은 금융 약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즉시연금은 출시 초기부터 '부자연금'으로 불렸다. 국민의 노후 보장이 목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이율과 비과세 혜택이 합쳐져 고액자산가들의 투자 상품으로 탈바꿈했다.

실제 보험연구원이 2012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즉시연금의 평균 보험료 규모는 1억8000만원에 달했다. 목돈은 커녕 월 10만원 보험료 내기도 빠듯한 서민ㆍ취약계층과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몇년전 전대통령 배우자가 30억원대 즉시연금에 가입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만 봐도 즉시연금이 금융 약자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금감원이 명분만 잃은 게 아니다. 실리도 얻지 못했다. 보험사들을 압박하면 백기를 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보면 반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삼성생명은 금감원의 일괄구제 요구안을 거부하며 법적인 소송을 불사하고 있다. 다른 보험사들도 아직까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금감원이 당혹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억지 명분을 내세우며 무리수를 뒀지만 얻은 게 없다는 얘기다.

이제 금감원이 택할 카드는 많지 않다. 전가의 보도인 보복 검사도 쉽지 않다. 스스로 하지 않겠다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공개 선언했다. 그렇다면 금감원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지켜보는 눈이 많다.




유인호 기자 sinryu007@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