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헝가리 '오레무스(Oremus)'
1630년 시작된 세계 최초의 귀부와인
소테른·TBA와 함께 세계 3대 스위트 와인
달콤함의 범주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변주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는 새로 취직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일로나에게 첫눈에 사로잡힌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곡 글루미 선데이를 그녀에게 선물하고, 이 곡은 이후 음반으로 발매돼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마음을 잔잔히 흔든다. 극 중 철강·섬유 재벌 멘델 가문의 딸 역시 안드라스가 직접 연주하는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나직이 말한다.
달콤함은 대개 즐거움과 닿아있다. 하지만 어떠한 달콤함은 감정의 촉매제로 작용해 심연의 쓸쓸함을 불러오고 이내 서글픔과 마주하게 해 끝내 우울함에 굴복하게 만든다. 이 서글픈 달콤함은 쉬이 만날 수 없는 까닭에 더욱 고귀하다. 헝가리에는 글루미 선데이만큼이나 사람을 서글프게 만드는 달콤함이 하나 더 있다. 고귀하지만 부패한, 그래서 쉬이 만날 수 없는 노블롯(Noble Rot, 귀한 부패) 포도로 빚어낸 귀부와인, '토카이 아수(Tokaji Aszu)'다.
오레무스, 토카이 전설의 기원
헝가리 토카이 지역의 '오레무스(Oremus)'는 달콤하지만 서글픈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묘약을 잠잠하게 빚어내는 와이너리다. 오레무스를 품고 있는 토카이는 헝가리 북동쪽 구릉지대로 프랑스의 '소테른(Sauternes)', 독일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 TBA)'와 더불어 세계 3대 귀부와인으로 꼽히는 토카이 아수 와인의 산지다.
오레무스는 토카이 아수 와인의 기원인 곳이다. 1630년 칼뱅파 목사였던 셉쉬 러코 마테이(Mate Szepsi Lacko)가 오레무스 포도밭에서 노블롯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토카이 아수 와인이자 최초의 귀부와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왕의 와인이자, 와인의 왕(The Wine of Kings, King of Wines)"이라고 평가하는 등 최음제·정력제로 여겨지며 왕족과 귀족들의 머리맡을 지키기도 했다. 토카이 와인의 명성이 높아지며 모방이 급증하자 1737년에는 세계 최초로 와인산지의 경계 구분과 이에 따른 등급제가 실시되기도 했다.
유럽 전역에서 고급 와인으로 명성을 쌓아 올렸던 토카이 와인은 1950년대 헝가리가 공산화 과정을 겪으며 국영화됐고, 이후 대량생산에 집중하며 급격한 품질 하락과 함께 기억에서 멀어졌다. 쇠락하던 토카이 와인이 회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1989년 공산당 체제가 무너지면서다. 체제 붕괴와 함께 국영 와인 기업 '코르콤비나트'가 해체됐고, 외국 자본의 유입이 가능해지면서 프랑스의 보험사 '악사(AXA)' 등이 토카이 지역에 적극 투자하며 부흥의 전기가 마련됐다.
이 과정에서 오레무스도 1993년 스페인의 '베가 시실리아'에 인수되며 새 주인을 맞이했다. 베가 시실리아는 인수 이후 코르콤비나트를 경영했던 아드라스 바크소를 총괄 디렉터로 영입해 헝가리 와인의 유산이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품질 향상에 집중했다. 킨들 로버트(Kindl Robert) 오레무스 총괄 매니저는 "베가 시실리아의 알바레즈 가문은 최적의 포도나무 재배 방식과 와인 양조 방법을 찾기 위해 수년간 연구와 투자를 이어가며 와인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며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의 와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1999년 빈티지 와인은 1989년 이후 10년 만에 오레무스에서 생산된 빈티지 와인"이라고 설명했다.
토카이 아수, 귀부균이 만들어낸 달콤한 마법
토카이(Tokaj)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은 지역의 이름을 따서 토카이(Tokaji)라고 부른다. 하지만 토카이에서 생산되는 와인 가운데 '보트리티스 시네리아(Botrytis Cinerea)'라는 곰팡이에 감염된 포도로 만든 와인만 오직 토카이 아수라는 이름을 얻는다. '아수(Aszu)'는 귀부균(貴腐菌) 또는 노블롯이라고 불리는 보트리티스 시네리아 곰팡이에 감염돼 바짝 마른 포도를 말하는데, 아수 포도로 만든 스위트 와인이 바로 토카이 아수다.
귀부균에 감염된 포도의 껍질에는 미세한 구멍이 수없이 뚫리는데, 이곳을 통해 과즙 속 수분이 증발해 건포도처럼 말라 들어간다. 마른 포도는 겉보기에는 곰팡이가 가득 핀 주름진 포도에 불과하지만 당분과 향이 진하게 농축돼 입에 넣으면 묵직한 단맛이 퍼진다. 이 포도를 압착하면 소량의 과즙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발효시키면 농익은 과일 향이 풍부한, 꿀보다 감미로운 와인이 만들어진다. 귀부와인의 단맛은 직관적인 단맛이 아닌 곰팡이에서 유래한 독특한 향과 복합적인 맛을 보여준다.
하지만 귀하게 부패한 아수 포도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귀부균은 아무 곳에서나 발생하지 않는다. 주변에 강이 있어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습도를 제공하고, 한낮에는 따뜻한 햇볕으로 맑고 건조한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젬플렌 산맥(Zemplen Mountains) 남쪽 보드로그(Bodrog)강과 티서(Tisza)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토카이는 이러한 귀부균 생성에 최적화된 지역이다. 여름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가을에는 산과 강에서 안개가 올라와 보트리티스 곰팡이를 유발한다.
토카이의 이러한 자연환경은 프랑스와 독일보다 훨씬 뛰어난 귀부와인을 만들어낸다는 자부심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스코 안드라스(Bacso Andras) 오레무스 마스터 셀러는 "포도가 최적의 상태로 농축되려면 토카이처럼 비가 내리고 마르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며 "(프랑스의)소테른은 상대적으로 햇빛은 적고 전반적으로 습기가 내려앉은 지역이기 때문에 토카이만큼 포도가 심하게 말라비틀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토카이 아수가 복합미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토카이의 토양은 미네랄 함유량이 풍부한 화산토라는 점도 포도와 와인에 산도를 부여해 높은 당도에도 물리지 않고 마실 수 있는 균형감 있는 와인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때론 우아하게 때론 경쾌하게"…달콤하게 펼쳐지는 다양한 변주
토카이 지역은 '푸르민트(Furmint)'와 '하르쉬레벨르(Harslevelu)', '샬가 무쉬코타이(Salga Muskotaly)' 등 3종의 토착품종을 주로 재배한다. 오레무스는 이 가운데 푸르민트에 집중하고 있다. 푸르민트는 헝가리에서 가장 폭넓게 재배되는 고급 화이트 품종으로 복합적인 향과 높은 산도가 특징이다. 어린 와인일 때는 사과 풍미에 높은 산도가 두드러지는 반면, 숙성이 이뤄지면 견과류와 꿀 풍미로 발전한다. 무엇보다 껍질이 얇은 푸르민트는 귀부균에 취약해 곰팡이가 잘 피어 아수 와인 생산에 주로 사용된다.
토카이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푸토뇨스(puttonyos)'라는 당도 단위에 따라 아수 와인을 생산한다. 푸토뇨스는 대략 20㎏ 용량의 나무통으로, 처음에는 포도를 옮기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점차 크기가 표준화되며 포도 수확물을 측정하는 단위로 발전했다. 토카이 아수 와인의 당도는 전통적으로 136L 크기의 '곤치(Gonci)'라고 부르는 오크통 한 통 분량의 베이스 와인에 아수 포도를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계산되는데, 이때 아수 포도의 투입 단위가 푸토뇨스다. 즉 푸토뇨스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더 높은 당도의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레무스도 푸토뇨스에 따라 아수 '3 푸토뇨스'와 '5 푸토뇨스', '6 푸토뇨스' 아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바스코 마스터는 푸토뇨스의 단위를 우열의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짚었다. 더 많은 양의 아수 포도가 투입됐다고 더 좋은 와인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푸토뇨스의 투입량 변화를 통해 달콤함이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서도 우아함부터 경쾌함까지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조금 더 올바른 이해라는 것이다.
바스코 마스터는 "아수 포도 안에서도 캐릭터의 차이가 존재한다"며 "단순히 같은 캐릭터의 포도를 양만 다르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3 푸토뇨스 와인은 산뜻한 느낌을 지향하기 때문에 산도가 높고 신선한 포도를 주로 사용해 양조하는 반면 5 푸토뇨스 와인은 복합미나 균형감이 중요해 산도와 당도가 밸런스를 갖춘 포도를 많이 사용한다"며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와인의 캐릭터에 맞는 포도를 혼합해 최적의 균형감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월의 더께와 함께 켜켜이 쌓아올린 기나긴 역사
오레무스의 와인은 발효부터 숙성까지 병입 전 모든 과정을 오크통에서 진행한다. 오레무스는 와인 양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프랑스나 미국산 대신 헝가리산 오크를 사용한다. 헝가리 오크는 쌉싸름한 맛이 비교적 강해 뜨거운 물에 삶아 쌉싸래한 맛을 제거한 뒤 오크통으로 만든다.
특이한 점은 오크통 사용 목적이 오크에서 비롯된 풍미를 뽑아내는 것보다는 미세 기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적절한 산화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점이다. 바스코 마스터는 "헝가리 오크 고유의 특징이 와인에 더 반영되길 원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보다는 프랑스나 미국 오크에서 기대하는 과한 나무 향을 지양하고 좀 더 누그러진 나무 향과 적절한 산화를 유도하기 위해 헝가리 오크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병입된 와인은 와이너리 내 천연 지하 셀러에 보관된다. 바스코 마스터는 "토카이 아수 와인들은 수십 년간 장기 숙성이 가능한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시설이 바로 천연 지하 셀러"라며 "17세기 처음 토카이 와인이 생산됐을 당시 온도나 습도 조절이 가능한 냉장 시설이 없었음에도 이 지하 셀러의 존재가 토카이 와인의 숙성과 보관을 도와줬고, 오랜 역사를 쌓아 올릴 수 있게 만들어줬다"고 설명했다.
지하셀러에는 오레무스가 켜켜이 쌓아올린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와인과 세월의 더께가 품위 있게 앉아있었다. 벽면이 벽돌로 조성된 굴 형태의 지하셀러에는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 조성돼 있었는데, 와이너리 측에선 안팎의 온도차가 상당하다며 들어가기 전 방한조끼를 제공했다. 실제로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지하셀러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고, 바깥 날씨보다 10도(℃) 이상 낮은 10~12℃ 가량의 기온에, 80~90%에 이르는 습도의 벽면에는 묵은 곰팡이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지난 세기를 넘어 지지난 세기의 와인까지 보관되고 있어 이곳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닌 와이너리인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만들었다.
헝가리 부모가 자녀에게 건네는 와인…"달콤함과 씁쓸함 사이의 균형"
헝가리에는 토카이 아수 와인을 품은 전통이 있다. 자녀가 태어난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토카이 아수 와인을 구매해 보관했다 그들이 성인이 되거나 결혼을 할 때 선물하는 것이다. 언뜻 자녀가 맞이한 의미 있는 시간을 축하하기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축하가 목적이었다면 토카이 아수는 굳이 필요치 않았을지 모른다. 세상에는 이미 축하와 닿아있는 술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짐작건대 부모가 자녀에게 진정 주고 싶었던 것은 삶이란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는 일이란 깨달음이었을 테다. 자신과 함께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품고 익어간 토카이 아수는 분명 달콤할 것이다. 하지만 달콤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불현듯 어수선하고 불안해지는 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찬란한 달콤함이 희미해져가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렇게 헝클어진 마음을 바라만 보고 있자면 결국에는 서글퍼진다. 입 안에 남은 건 아득한 씁쓸함뿐이기 때문이다.
삶은 대체로 씁쓸하고, 달콤함은 찰나에 불과하다. 찰나의 달콤함은 쉬이 만날 수 없기에 또 이내 사라져 버리기에 필연적으로 씁쓸함과 닿아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귀하다. 아무리 뛰어난 토카이 아수의 달콤함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 빼어난 토카이 아수를 즐겼다면 그 찰나의 달콤함은 훗날 맞이할 또 다른 달콤함을 기약하고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헝가리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토카이 아수를 선물하는 것도 이와 닿아있을 테다. 달콤함이란 본디 찰나에 불과한 씁쓸함의 씨앗일지라도 그로 인해 서글픔에 굴복해 무너지기보다는 또 다른 달콤함을 즐기기 위한 동력으로 삼아 결국엔 찬란한 달콤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 토카이 아수를 건네는 것일 테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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