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주'로 들여다본 탈북민 실태
3만4000명…대다수 두만강 건너 우회 입국
군사분계선 넘은 탈북자 대부분은 북한군
혼자 탈출해서 나왔다는 죄책감 시달려
두만강이 도망강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된 탈북민 수는 약 3만4000명. 1997년까진 877명에 불과했다.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한 해 탈북민이 1999년 처음으로 100명을 넘었다. 2002년에는 1000명, 2006년에는 2000명을 돌파했다.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2003년부터 2020년까지 줄곧 60%를 넘었다. 2018년에는 85%도 초과했다. 목적은 대부분 생계유지였다. 북한은 1990년부터 식량 사정이 어려워졌다. 보름에 한 번 배급하던 공급소가 사실상 문을 닫았다. 당국이 자력갱생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은 스스로 밥상을 책임져야 했다. 살아갈 길을 도모하다 탈북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이유는 질병 치료, 도피, 탈북자 권유 등이었다.
대다수는 '도망강'이라 불리는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 도착해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국내에 입국했다. 규남처럼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른 경우는 거의 없다. 북한군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어서다. 촘촘하게 배치된 지뢰와 살상용 함정도 한순간 목숨을 앗아간다. 접근조차 쉽지 않아 사실상 북한군만 시도할 수 있다.
군사분계선 넘은 간 큰 사내들
가장 널리 알려진 군사분계선 종단 탈북 성공 사례는 2017년 11월 판문점 경계선을 통과한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 씨다. 수렁에 빠진 차량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달리다 동료들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는 한미 군대의 치밀한 작전과 이국종 외과의의 수술로 목숨을 건졌다. 1998년 2월 북한군 상위(우리 군의 중위와 대위 사이에 있는 북측 계급) 변용관 씨도 판문점을 통해 탈북했다. 그는 판문점 경비 장교로 근무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지역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탈북자들도 대부분 북한군이었다. 주로 20대와 30대의 젊은 남성들이었다. 방식은 다양했다. 2012년 10월 강원도 동부전선에선 노크 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군 병사가 육군 제22사단이 관리하는 철조망을 넘어 경비대 출입문을 두드렸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30m가량 떨어진 다른 소초 출입을 찾아 다시 노크했다.
2015년 6월에는 북한군 하전사가 군사분계선 남쪽 500m 지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 군 경계병을 찾아가 귀순 의사를 밝혔다. 2021년 2월 강원도 고성군 민간인통제선 지역에선 수영 귀순하는 일도 있었다. 북한 남성이 잠수복과 오리발을 착용하고 해안가 배수로를 이용해 탈북했다. 그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해상을 통과해 민간인통제선 근처 국도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철책선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들은 탈북자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지휘관은 경계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아야 했다.
탈북민은 행복할까
규남은 에필로그에서 미소를 짓는다. 꿈꾼 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한 듯 보인다. 모든 탈북민의 삶이 그렇진 않다.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다양한 어려움에 시달린다. 김석향 이화여자대학교 북한학과 교수가 다수 탈북민을 심층 면담하고 쓴 '탈북의 역사'에 따르면 상당수는 혼자 탈출해서 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린 자녀를 두고 떠나온 엄마들의 경우 우울감에 빠져 자학 증상을 겪기도 한다.
"대다수 탈북민이 자신의 감정 상태가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모르며, 또 이런 상황을 건강하게 극복하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 대체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급급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돈벌이해도 당장 탈북할 때 도움을 준 브로커 비용을 갚아야 한다거나 북한과 중국에 남은 가족에게 송금해야 한다면서 초조해하는 등 늘 돈이 부족해 쪼들리며 살아가는 실정에 놓인 사람이 많았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배신자와 변절자라는 아우성도 심리적 괴로움을 가중하는 요인이다. 대부분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아 자기가 겪는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이 밖에도 상대적 박탈감, 무력감, 그리움 등 극복할 거리는 너무나도 많다. 김 교수는 탈북의 순간에 집중하기보다 이들의 생애 전반을 채록하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록의 공유만이 공동체 역사로 편입될 열쇠라며.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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