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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신호 기다리기 무서워"…'집단 트라우마' 호소하는 시민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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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 인근 직장인·상인 고통 호소
사고 관련 국가 차원 지원 없어
희생자 수 고려해 '중규모' 분류

"여기가 매일 오는 곳이거든요. 아직도 사람이 죽었다는 게 안 믿겨요."


지난 1일 교통사고로 사망자 9명이 발생한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교차로 현장은 대부분 정리된 상태였다. 사고로 부서진 펜스는 아직 수리 중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정비된 인도는 점심을 먹으려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인근 상인과 직장인들은 여전히 사고로 인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번 사고로 동료 4명을 잃은 시중은행 직원 이모씨(34)는 "점심시간이나 저녁 회식이 있을 때 북창동 먹자골목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기를 매일 지난다. 평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신호를 기다리는 곳에서 사람 9명이 죽었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다"며 "요즘엔 인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게 무서워 찻길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게 된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신호 기다리기 무서워"…'집단 트라우마' 호소하는 시민들 교통 사고가 발생한 서울 중구 시청역 교차로 인근에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술, 음료 등이 놓여있다.[사진=이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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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 수습됐지만, 시민 고통 여전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시청역 교통사고 등 최근 일주일 간격으로 대형 사고가 2건이나 발생하면서 정신적 고통(트라우마)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일수록, 희생자의 유족·가까운 지인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 역시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심리적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8일 오후 사고 현장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홀로 서 있던 한모씨(38)는 사건 당일을 떠올리며 "나 역시 가까스로 사고를 피했다"고 말했다. 당일 한씨는 여느 때와 같이 야근하기 위해 사무실에 남았다. 너무 피곤해 밀린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오후 9시께 예정보다 일찍 퇴근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한씨는 "할 일을 다 하고 가려다 그날따라 너무 피곤해 예상보다 일찍 나왔다. 나중에 동료들에게 '괜찮냐'는 메시지가 와있길래 들어가 보니 회사 바로 앞에서 9시27분쯤 사고가 났더라"며 "만약 일을 다 마치고 나왔더라면 내가 변을 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인근 상인들도 고통을 호소했다. 시청역 인근 고깃집에서 일하는 최모씨(47)는 당일 '쿵'하는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가게 앞으로 뛰쳐나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 보니 차에 치인 시민들이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최씨는 "구급차가 오고 다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까지 전부 지켜봤다"며 "그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사건 현장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가끔 꿈에 나오기도 한다. 더 생각하면 심장이 빨리 뛰어서 혼자 심호흡을 할 때도 많다"고 전했다.


시청역 사고, 정부 차원 지원서 빠져…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어

전문가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아무 관련 없는 시민이 다수 희생된 사고일수록 일반 시민이 느끼는 심리적 공포감과 정신적 고통은 훨씬 클 수 있다고 조언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초기엔 극한의 스트레스를 느끼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과 공포, 애도, 죄책감 등으로 발전하고, 증상이 더 악화하면 절망감과 자살 생각 등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참사 발생 초기에 국가적 차원의 심리 치료 지원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평범한 장소에서 발생한 사고일수록 일반 시민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더 클 수 있다"며 "많은 시민이 미디어를 통해 사고 영상과 기사를 접하면서 간접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겼을 수 있다. 국가적 차원의 심리 치료 지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신호 기다리기 무서워"…'집단 트라우마' 호소하는 시민들 교통 사고가 발생한 서울 중구 시청역 교차로 인근에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술, 음료 등이 놓여있다.[사진=이서희 기자]

사회적 참사 이후, 범정부적 심리 지원 시스템은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보건복지부(국가트라우마센터) 주도의 통합심리지원단 구성 역시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 시청역 교통사고와 관련한 트라우마 치료는 서울 중구 기초센터와 서울 광역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시청역 교통사고가 희생자 수 등을 고려해 '중규모' 사고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정부는 희생자 수 등을 고려해 사고 규모를 총 3단계로 나누는데, 소규모인 경우 기초지자체, 중규모인 경우 광역지자체, 대규모인 경우 국가트라우마센터 등 정부 차원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에 대해 지난달 25일부터 국가트라우마센터,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경기도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정부와 지자체가 연계한 범정부적 통합심리지원단을 운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아직 시청역 교통사고와 관련한 통합심리지원단을 구성할 계획은 없다"며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부 지침에 따라 사고 규모를 총 3단계로 나눠 이같이 결정했다. 화성 공장 화재 사고의 경우, 희생자가 23명으로 훨씬 많기도 했지만, 이 가운데 외국인이 많아 광역 단위에서 지원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범정부적 지원을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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