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자녀를 낳고 50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둔기로 살해한 70대 남편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재판에서 이 남편은 술에 취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며 감형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73)의 상고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사실을 오인하거나 심신미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A씨의 상고를 기각한 이유를 밝혔다.
1973년 아내 B씨(사망 당시 68세)와 혼인한 A씨는 5명의 자녀를 낳으며 50년째 혼인 생활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아내 B씨가 식당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서울 양천구에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마련한 반면, A씨는 가끔 일용직 노동을 했을 뿐 일정한 직업이 없어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지 못하고, 평소 자녀들이 아내하고만 교류하는 것에 가장으로서 열등감을 느꼈던 A씨는 수십년 전부터 술에 취하면 어린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도 아내를 폭행하거나 집안의 물건을 부수곤 했는데, 수년 전부터 알코올 중독의 영향으로 그의 폭력적인 행동은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A씨는 2020년 10월 불을 질러 아내를 죽이겠다며 라이터로 안방 장롱에 있던 속옷에 불을 붙였다가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된 일도 있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2023년 2월 7일 A씨와 B씨는 함께 살던 딸 C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우울증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A씨는 C씨를 구급차에 태워 보낸 후 외출해 인근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주점에서 맥주 5병 정도를 마시고 오후 10시께 귀가했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2023년 2월 8일 0시4분께 집 근처 편의점을 찾아가 소주 1병과 안주거리를 사서 집에 돌아온 A씨는 B씨에게 "당신 명의의 집을 담보로 1000만원 정도 대출을 받아 돈을 좀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B씨는 A씨의 부탁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서로 밀고 당기며 몸싸움을 벌였다. B씨는 안방으로 피했지만, A씨는 B씨를 따라 들어가 계속 다투던 중 순간적으로 화가 나 베란다에 있던 길이 약 43cm의 망치를 들고 와 뒤돌아 앉아 있던 B씨의 뒤통수를 30여 차례 가격해 숨지게 했다.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심신미약의 상태에 있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A씨의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과거 알코올 의존증후군으로 3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은 사실과 전문심리위원인 전문의가 'A씨는 적어도 중증도 내지 고도의 알코올중독 증상 상태'라는 소견을 밝힌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이르렀다고는 보이지 아니한다"라며 "따라서 피고인 및 변호인의 심신미약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A씨가 B씨를 살해한 뒤 살해 도구로 사용한 망치를 다시 베란다 수납장 부근에 가져다 놓은 걸 보면 범행 당시 A씨에게 사물변별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A씨가 범행 직후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점에 비춰 당시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윤리적 의미를 판단하는 의사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수사기관에서 범행 당시의 주요 상황, 피고인과 피해자의 당시 대화 내용 등을 비교적 명확하게 진술한 점 ▲전문심리위원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당시 음주로 인해 의식이 저하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밝힌 점 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부부의 인연을 맺은 배우자를 살해하는 행위는 가장 존엄하고도 중대한 법익인 사람의 생명을 박탈함과 동시에 혼인관계에 기초한 법적·도덕적 책무를 원천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서 가족 간의 윤리와 애정을 무너뜨리고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남기므로, 그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의 무리한 금전적 요구를 피해자가 거절하자 피고인은 이에 격분해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는 바, 그 범행 동기에 참작할 여지가 전혀 없고, 그 범행 수법이 매우 잔혹하고 무자비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A씨가 방화미수 범행으로 집행유예 기간 중에 살인을 저지른 점도 불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극히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된 피해자 자녀들의 심적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더욱이 한 자녀는 사건 현장을 목격하기까지 했다"라며 "위 자녀들은 현재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A씨는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은 모두 정당하고, 거기에 사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없다"라며 기각했다.
또 재판부는 "원심의 형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라며 A씨와 검사의 양형부당 주장을 모두 배척했다.
대법원도 이 같은 2심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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