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부채 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5월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짬을 내 이름만 들어본 유명 미술관들을 둘러봤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 그림을 볼 수 있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한 때는 느지막하게 해가 질 무렵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마지막 1시간 동안 관람료를 받지 않았다.
지난달 21일 미술계 현장간담회에서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무료 관람이 화제가 됐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여론 수렴을 전제로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무료 관람 제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무료 관람 탓에 사립 미술관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이날 무료 관람 화두가 제기된 주된 이유였다.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이 국고를 지원받는 만큼 사립 미술관이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사립 미술관의 경쟁력을 제고할 필요도 있다.
다만 그 방식이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무료 관람 정책 재검토라면 올바른 방향인지 의문이 든다.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무료 관람 정책이 저소득층의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는 등 사회적 이득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회적 이득이 큰 무료 관람 정책의 취지를 유지하면서 차라리 사립 미술관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 방향이 옳지 않을까.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가 무료로만 운영되는 것도 아니다. 큰 규모의 기획 전시는 유료로 운영되며 유료 전시에 관객이 많이 몰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김구림 전과 장욱진 회고전은 관람료 2000원을 받는다. 올해 초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은 관람료 1만8000원(일반 성인 기준)이었지만 연일 매진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지난 8월까지 큰 화제를 모으며 선보인 에드워드 호퍼 전의 관람료도 1만7000원이었다. 전시 내용이 좋다면 대중은 얼마가 됐든 비용을 지불한다. 결국은 관람료가 아니라 전시 내용의 질이 관건이라고 봐야 한다.
서울시 오페라단은 지난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천원의 행복; 오페라 갈라 아듀(Adieu) 2023’ 공연을 했다. 오페라 갈라 공연의 VIP석은 통상 10만원을 훌쩍 넘지만 이날 공연 관람료는 전석 1000원이었다. 천원의 행복은 세종문화회관이 2007년 시작한 사회공헌 프로그램 중 하나다. 세종문화회관은 그 1000원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행복동행석도 운영한다. 관람료 1000원도 지불하기 힘든 이들을 위해 다른 누군가가 대신 비용을 지불하고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세종문화회관 천원의 행복은 사회 공헌과 함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을 늘리는 저변 확대가 목표다. 비싼 입장료 때문에 오페라나 뮤지컬을 관람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 관람 기회를 제공하고 이들을 공연 시장으로 유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국고로 운영되는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무료 관람 정책은 공정 경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장 원리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 천원의 행복처럼 시장 규모를 키우는 계기가 된다면 결국 미술계 전체에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까.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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