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 간 손실 감수했으나 한계 도달
러시아는 점유율 1위 시장 …포기 어려워
공장 자산 가치만 2조원 육박
현대차, 다양한 시나리오 대응 검토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현대차그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전쟁 시작 이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하나둘씩 러시아를 떠났다. 현대차그룹도 기로에 섰다. 지난 1년간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계속 대규모 손실을 감수할 순 없다. 그렇다고 점유율 1위를 달성한 러시아 시장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지난 2021년 8월 현대차·기아(제네시스 포함)는 합산 점유율 28.7%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현대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HMMR)을 짓고 러시아에 진출한 지 10년 만에 얻은 성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현대차 동유럽 시장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러시아 시장 점유율을 꾸준히 늘릴 수 있었던 배경에도 늘 초과 가동 중인 공장의 역할이 컸다. 2020년 생산 누적 200만대를 넘겼다. 공장 자산 가치만 2조원에 달한다.
3년 전 현대차는 러시아 GM 공장까지 인수했다. 기존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과 근처 슈사리에 있는 GM공장까지 합쳐 연산 30만대 생산 기지 구축 계획을 세웠다. 인수 후 대규모 투자로 설비를 보완하고 다목적차량(MPV) 스타리아,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 대형 SUV 팰리세이드 등 인기 모델을 찍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지난해 3분기 기준 현대차 러시아 공장은 4만2821대를 생산했다. 가동률은 29.3%. 평소 생산량의 3분의 1에도 못미친 실적이다. 지난해 3월 가동 중단 이후엔 사실상 설비 점검 차원에서 라인을 돌리는 정도다. 러시아 GM공장은 인수 후 제대로 가동 한 번 하지 못했다. 3년 동안 공들여 지은 현대위아 러시아 엔진 공장은 가동을 시작한 지 겨우 5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한때 30%에 육박했던 현대차·기아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올해 2월 4.2%까지 쪼그라들었다. 한국차의 빈자리는 하발(12.7%), 지리(9.7%) 등 중국 브랜드들이 꿰찼다. 지난해 러시아 자동차 시장 규모는 63만대로 전년 대비 57% 감소했다. 경제 제재로 유럽 및 아시아 완성차 메이커들이 대거 러시아 시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르노, 닛산, 포드 등 다른 업체들처럼 자산을 헐값에 넘기긴 어려워 보인다. 자산 규모가 큰데다 현대차 권역별 판매에서 러시아의 비중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르노 등은 러시아 국영기업에 합작사 지분을 1루블, 1달러처럼 터무니없는 가격에 매각했다. 일단 지분을 넘기고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5~6년 내에 다시 되사는 조건(바이백 옵션)을 붙였다. 조건은 붙였지만 5년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자동차 산업의 특성 때문에 한 번 철수하면 사실상 재진입은 어렵다고 업계는 본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 상황에서도 끝까지 러시아 시장을 놓지 않았다. 루블화 가치 폭락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구매력이 떨어지고 자동차 시장도 급격히 위축됐을 때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방문해 "러시아 시장에 다시 기회가 올 것이므로 어려워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두고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이다. 대응 시나리오에는 공장 매각, 사업 철수뿐만 아니라 버티기 전략까지 포함된다. 현재 러시아에서 한국산 승용차를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병행 수입이 유일하다. 러시아 딜러사들은 제재를 피하기 위해 중국, 이란 등 제3국을 통한 병행 수입을 늘리고 있다. 물론 제재가 강화되면 이마저도 어려울 수 있다. KOTRA 모스크바 무역관 관계자는 "전문조사기관들이 올해도 대러 제재 지속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시장을 예측하고 있다"며 "우리 기업들도 이를 감안해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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