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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한국 대표 어머니의 눈부신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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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한국 대표 어머니의 눈부신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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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등 통해 정형화 된 이미지, '만추'·'마더'서는 색다른 캐릭터로

"난 살림도 못하는 연기에 빠진 엄마" '눈이 부시게' 혼신 연기로 관객에 위로

오늘 오후 7시 롯데시네마 합정 '스타체어' 주인공…'마더' 흑백버전 상영


배우 김혜자(78)는 5월을 좋아한다. 집 마당에 라일락꽃과 살구꽃이 만발한다. 그녀는 풍경에 말을 건넨다. 꼬리치는 강아지의 안부도 잊지 않는다. 소녀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산수(傘壽ㆍ여든 살)를 앞둔 나이에도 눈동자에 청순미가 가득하다. 주위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특별한 능력의 샘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머니의 온기로 착각한다. 오랜 시간 드라마에서 다양한 어머니 상(像)을 보여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전원일기(1980~2002년)'의 이은심과 '사랑이 뭐길래(1991~1992년)'의 여순자, '그대 그리고 나(1997~1998년)'의 김은순, '장미와 콩나물(1999년)'의 이필녀.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애잔한 눈빛으로 자식을 대한다. 수십 년 동안 김혜자를 가두어놓은 이미지다.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 상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라임라이트]한국 대표 어머니의 눈부신 5월


대중에게 어머니로만 기억되기를 바라는 여배우는 없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이고 특별한 삶의 주체다. 익숙한 틀을 깨트릴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김혜자는 첫 영화인 '눈물의 여인(1969년)'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겨우 네 신에 등장하지만, 포도알 같은 눈망울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침에 핀 백국처럼 아름답다. 가을바람을 타고 관능미로 발전한다. '만추(1981년)'에서 특별 휴가를 받아 강릉행 열차에 몸을 싣는 모범수 혜림이다. 낙엽에 파묻혀 민기(정동환)와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절망 끝에서 타오르는 사랑. 발가락을 오그리는 움직임만으로도 도취된 감정이 전해진다.


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한 얼굴은 '마더(2009년)'에서 절정에 이른다. 대상은 아들이다. 자신의 뱃속에서 열 달을 키워 내보낸 이성으로 나타난다. 살인범으로 몰리자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죽은 소녀의 장례식장까지 찾아간다. 유족 앞에서 지그시 감은 눈을 뜨며 절박한 심정과 공격적인 태도를 동시에 드러낸다. "사실은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오른쪽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번져 오는 비애와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하다. 단순히 흉내만 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깊이다. 숱한 어머니 연기와 새로운 표현을 갈구해온 열정이 한데 어우러졌다.


[라임라이트]한국 대표 어머니의 눈부신 5월


김혜자에게 새로운 이정표는 아니다. 이미 14년 전 드라마 '여(1995년)'에서 두 가지를 모두 보여줬다. 경포대에서 어린아이를 납치해 자신의 딸로 삼는 송민숙. 딸 김용설(신은경)이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안절부절못한다. 그녀의 애인 박성혁(최불암)까지 건드리자 자포자기한다. 초췌한 몰골로 침대에 기대 앉아 나지막이 속삭인다. "같이 죽자. 너는 내 희망이었는데. 같이 죽자." 오른쪽 눈 주변이 가늘게 떨린다. 김용설은 그런 그녀를 모진 말로 자극한다. "엄마한테는 아저씨가 있잖아요. 아저씨가 엄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전화해보세요." 송민숙은 약 올리는 딸의 뺨을 후려친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말 몇 마디에 주저앉고 만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엄마로 돌아간다. "엄마, 왜 때려요?" "엄마?" "네, 엄마. 엄마, 제가 뭘 잘못했어요?" "용설아, 같이 죽자. 같이 죽자."



김혜자는 연기할 때마다 배역에 미친 듯 빠져든다고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빠져들 만한 배역이 없으면 '배우로서 나는 죽는 일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런 이유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그리는데 배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바쳤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내가 현모양처인줄만 알죠. 아니에요. 난 살림도 못하고, 대본만 받으면 그날부터 대본 속의 인물이 돼버려서 식구들은 잊고 살았어요. 그런데도 남편과 애들은 배우니까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주었죠." 20여 년 전 생각은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거치면서 달라졌을 수 있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며 마지막 내레이션을 다시 읊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물론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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