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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환/임경섭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1초

 
 발광하는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그곳이
 우거진 숲인 듯도 했고
 외진 고개의 포장길인 듯도 했던
 그때
 발광하는 형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그것이
 사람을 찾는 손전등 같기도 했고
 길을 찾는 자동차의 전조등 같기도 했던
 그때
 발광하는 형체가 눈이 부시도록 거대해졌다고 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우리가
 조난당한 등산객인 듯도 했고
 차에 치이기 직전의 고라니인 듯도 했던
 그때
 얼어붙은 몸으로 발광하듯 눈을 떴다고 했다
 눈을 떴으나
 주위가 어둠보다 어두웠으므로 우리가
 우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오후 한 詩]환/임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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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시의 여러 매력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하나 붙잡았다 싶은 맥락을 따라 한참을 읽어 가다 보면 영 다른 길이 나타나고, 그래서 또 다른 궁리들을 곰곰이 해 보고 그러는 게 시 읽기의 재미라고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진실을 덧붙이자면 우리가 지금 당장 대하고 있는 것은 시인이나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글자들이다. 그러니 시 읽기란 과감히 말해 눈에 보이는 글자들을 끌어다 스스로 차근차근 헤아리는 일이지 그 너머까지를 바라볼 이유는 없다. 내가 이 시에서 유심히 더듬어 본 글자들은 "고 했다"와 '-듯(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와 제목인 "환"이다. 이 시 속의 세계는 어쩌면 모두 '환(幻)'일 것이다. 이 시는 '환의 세계'가 어떻게("어둠의 한가운데였으므로") 실재인 듯이 전환되는지,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문득("그때") 다른 '환'으로 대체되는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어둠의 한가운데" 또한 '환'이지 않을까? "눈을 떴으나" "주위가 어둠보다 어두웠"다니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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